성명 및 논평

[성명] 170일만에 이뤄진 청주방송의 사과와 합의를 환영한다. 이제 청주방송에 이어 전국의 모든 방송 노동을 바꿔 나가자!

202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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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170일만에 이뤄진 청주방송의 사과와 합의를 환영한다.

이제 청주방송에 이어 전국의 모든 방송 노동을 바꿔 나가자!


지난 7월 22일 CJB 청주방송 故 이재학 PD 대책위와 이재학 PD의 유가족, 전국언론노동조합, 그리고 CJB 청주방송 사측까지 4자가 이재학 PD의 죽음에 대한 공식 사과와 이재학 PD에 대한 명예회복 방안, 그리고 청주방송 비정규직 고용구조 및 노동조건 개선 등에 대한 합의를 최종적으로 타결했다. 그 다음 날인 7월 23일에는 4자가 조인식을 가지는 동시에 합동으로 기자회견까지 열어 청주방송 구성원과 대내외에 합의 소식을 공개적으로 전달했다. 이재학 PD가 사망한지 170일 만의 합의이자, 진상조사위원회의 보고서가 정식으로 발표된 지 약 한 달만의 일이다.

이재학 PD의 죽음은 한국 방송 노동 환경의 열악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2004년 청주방송에 입사해 정규 프로그램, 특집 프로그램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프로그램들을 연출했다. 매주 정해진 시간에 맞춰 방송 제작을 마치기 위해 집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회사에서 숙식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청주방송에서 만드는 수많은 프로그램의 스탭롤에 ‘이재학’이라는 세 글자가 빠짐없이 들어갔지만, 청주방송은 정작 이재학 PD를 소중한 동료나 구성원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14년간 그는 단 한 번도 정규직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14년만에 처음으로 자신과 동료를 비롯한 프리랜서 PD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자, 회사는 곧바로 그 다음 날 모든 프로그램에서 이재학 PD를 강제로 하차시키는 것으로 응대했다.

14년간 자신의 젊음을 다 바쳐 청주방송에서 방송을 만들어 왔지만, 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없었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고, 법원에서도 자신의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한 이재학 PD는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은 이재학 PD를 부리기에만 바빴을 뿐 고인의 정당한 요구를 내팽개친 청주방송의 잘못이지만, 수십년 간 비정규직과 ‘무늬만 프리랜서’를 양산하며 열악한 노동 환경을 방치하고, 방송 노동자들의 인권을 개선하지 않은 한국 방송 산업 전반의 처참한 현실도 있었다.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 이재학 PD의 유가족과 대책위는 반년에 가까운 170일 동안 숨가쁜 투쟁을 계속 이어왔다. 그리고 그 투쟁의 결실로 청주방송이 이재학 PD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명예회복 방안을 마련하며, ‘제2의 이재학’과 같은 안타까운 희생자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서 비정규직 고용구조와 노동조건을 개선하겠다고 선언을 하게 되었다. 동시에 제대로 그 약속이 지켜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3년간 총 5번에 걸쳐 진상조사위원회의 이행 점검을 받기로 하였다. 방송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 인정과 명예 회복, 전면적인 비정규직 문제 해결, 그리고 이행 점검까지 받기로 결정한 것은 한국 방송 사상 최초의 사건이다. 이번의 합의가 전국의 수많은 방송사와 제작사에 큰 귀감이 되길 바란다.

물론 과제 역시 여전히 많다. 청주방송에서 발생했던 노동 문제의 원인 중 하나였던 방송사를 쉽게 특정 개인이나 회사가 사유화할 수 있는 구조를 타파하고 방송사의 경영 방침에 노동자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길을 차근차근 마련해야만 한다. 방송 작가의 정규직화가 함께 이뤄지지 못하고 별도 TF를 구성해서 진행하기로 한 것도 이번 합의가 낳은 또 다른 과제이다. 더 나아가서는 방송통신위원회를 비롯해 방송 산업 전반을 관리·감독해야 할 기관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오랜 시간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방송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법률과 제도의 도입도 시급하다.

그러기에 이번의 4자 합의는 완전한 마무리가 아니라, 진정한 방송 노동 환경 개선과 방송 노동 인권 향상을 위한 또 다른 한 걸음의 시작이다. 청주방송이 제대로 합의의 정신을 지킬 수 있기 위해서는, 청주방송의 변화가 청주방송을 넘어 방송 산업 전반을 바꿀 수 있기 위해서는, 정부 기관들이 방송 노동자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앞장서서 권익을 보호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의 연대와 투쟁이 필요하다.

2016년 CJ ENM tvN의 신입조연출로 입사한 그 해 열악한 방송 노동 환경에 죽음으로 저항한 故 이한빛 PD의 의지를 계승해 2018년 창립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170일간 대책위에 함께 했던 경험을 소중히 간직하고, 계속 상기하면서 앞으로의 방송 노동 환경 개선 활동에 전념할 것이다. 동시에 한 편의 방송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방송 노동 환경의 변화에 무수한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재학 PD의 유가족과 170일간 투쟁에 함께 동참했던 대책위의 모든 구성원들,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이재학 PD의 죽음의 진상을 추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진상조사위원들, 그리고 이 투쟁에 함께 목소리를 높여 준 방송 노동자와 시민들에게 진정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이 연대의 물결이 더욱 널리 퍼질 수 있기 위해 앞장서도록 하겠다.


2020년 7월 24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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