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빛의 당부로 함께 맞은 봄
지난 해 10월 29일 이른 새벽, 문득 눈이 떠졌다. 무심코 켠 스마트폰에 속보 알림이 요란했다.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영상과 기사들을 보며 마음이 심하게 요동쳤다. 갓 스물을 넘은 큰 아들 또래 친구들과 제자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침 식사할 엄두를 못 내고 몇 시간째 마음 졸이며 뉴스를 보던 중 아들의 방문이 열렸다. 늦은 아침 고개를 내민 아들의 얼굴이 너무나 반가웠다.
“엄마, 이태원 뉴스 본 거야?”
“응, 그런데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어떻게 이런 일이...”
“사실 나도 어제 이태원에 가려 했었어. 인스타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할로윈 축제 이야기가 하도 많이 올라와서 궁금했거든... 저녁부터 살짝 몸살기가 돌아서 안 갔는데...”
생각지 못했던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철렁하는 가슴을 쓸어내림과 동시에 죄책감이 들었다. ‘내 자식 일만 아니면 된다‘는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면의 안도감 뒤로 먹구름처럼 뒤덮는 무거운 마음의 정체를 알 길도, 피할 길도 없었다.
스스로 그 마음을 물으며 맞은 지난해 겨울은 유난히 길고 힘들었다. 문득문득 지켜주지 못하고 떠나보낸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슬픔의 터널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던 중 1월 28일 치유자, 정혜신 선생님과 함께한, ‘당신이 옳다’ 100일 프로젝트로 맺어진 ‘한빛의 친구들’ 정기 모임에 참석했다. 정혜신 선생님을 비롯한 30여 명의 참석자가 오랜만에 친정을 방문하는 듯 들뜨고 설레는 마음으로 갖가지 먹거리를 손에 손에 들고 한빛센터에 모여들었다. 한빛 엄마, 김혜영 샘은 자살 유가족 협회 회원 중 세 분의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참석하셨다.
센터의 휴일이었지만 김영민 센터장님과 송하민 사무차장님도 일찌감치 출근하여 한빛 아빠, 이용관 선생님과 함께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행사가 시작되자 세 분은 먼저 인사를 나눈 뒤 이태원 참사 100일 행사 참여차 자리를 뜨셨다. 일상을 살아내느라 참사의 슬픔에 오로지 집중하지 못했던 빈 시간들을 지켜가는 분들이 계심을 알게 되어 숙연했다.
“오늘 이 자리에 왜 오게 되었을까요?”라는 정혜신 선생님의 질문에 참석한 모두가 돌아가며 한 마디씩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를 만나러 왔다’, ‘형편이 허락지 않음에도 마음이 끌려서 무작정 질렀다’, ‘친정 찾듯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왔다’, ‘숨 고르기 위해 왔다’, ‘내 아이 한 사람만이라도 거침없이 사랑하고 싶어서 왔다’ 등 돌아가며 저마다의 이유를 말했다. 김혜영 선생님은 ‘세 분의 유가족 어머니들이 빨리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에 함께 참석했다’고 하셨다. 유가족 어머니 중 한 분은 ‘여러분의 살아가는 모습이 참 아름다워요. 살아있는 동안 많이 사랑하세요’라고 이야기 들은 소감을 전하기도 하셨다. 또 한 분은 ‘이 모임에서 울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한 편안함을 느낀다’고 하셨다. 서로의 마음에 자기 마음을 잇대 가지를 치듯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한 배에 실려 굽이굽이 파도를 타듯 함께 울고 웃으며 밤 아홉 시를 훌쩍 넘겼다.
그 과정에서 나는 겨우내 덮친 무거운 마음의 실체를 바라보기도 했다. 오랜 알콜 의존으로 ‘폐인’이라 불리며 거리를 헤매다가 내가 열일곱 살 되던 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라는 존재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밑천이라고는 뼈대 있는 가문이라는 자존심 하나뿐인 한 집안의 장손이자 오남매의 아버지로 겹겹이 어깨가 무겁고 외로웠던 아버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오랜 죄책감이 내면의 어두운 밀실에 독사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봐야 어린 고등학생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라는 판단의 말 뒤로 ‘병들어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마음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순간순간 독기를 내뿜곤 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저마다 겪어온 상실의 아픔을 듣고 도닥이다 보니 나를 향한 독사의 혀가 어느새 보드라운 솜털이 되어 상처 입은 마음을 포근하게 감쌌다.
정혜신 선생님은 ‘죽음’ 또한 ‘삶’의 일부라고 하셨다.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있는 자와의 관계는 계속되기에 죽음이 곧 한 존재의 끝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0년이 넘게 나는 아버지와 수많은 이야기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 이야기들이 두렵고, 어둡고, 무거웠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막연한 존재를 향한 독백 같이 여겼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살아 있는 존재 간의 관계만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죽음 이후의 관계도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아버지와 주고받은 수많은 사랑의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 안의 어린 소녀가 안타깝게 놓쳤던 아버지와의 사랑의 끈을 다시 붙잡자 대상을 찾지 못해 막막하게 스스로를 향하던 독설이 그 방향을 제대로 돌려 통렬히 질문 할 수 있었다.
“배우지 못하고 힘없는 한 가장의 무거운 어깨를 이 사회는 왜 품어주지 않았을까?”
이토록 무정한 사회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상실의 트라우마를 함께 마주하자 우리는 어느새 기적처럼 ‘사랑’이라는 하나의 마음으로 군무를 추듯 모여들었다.
“이제 용기 내어 사랑으로 성큼 다가갈래요”라는 한 참석자의 마무리 소감으로 우리 모두의 가슴에 환한 희망의 등이 켜졌다. 함께하는 내내 ‘이 미친 세상의 어디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라는 한빛의 간절한 당부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생생하게 들려왔다.
한빛의 당부로 함께 맞은 봄
지난 해 10월 29일 이른 새벽, 문득 눈이 떠졌다. 무심코 켠 스마트폰에 속보 알림이 요란했다.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영상과 기사들을 보며 마음이 심하게 요동쳤다. 갓 스물을 넘은 큰 아들 또래 친구들과 제자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침 식사할 엄두를 못 내고 몇 시간째 마음 졸이며 뉴스를 보던 중 아들의 방문이 열렸다. 늦은 아침 고개를 내민 아들의 얼굴이 너무나 반가웠다.
“엄마, 이태원 뉴스 본 거야?”
“응, 그런데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어떻게 이런 일이...”
“사실 나도 어제 이태원에 가려 했었어. 인스타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할로윈 축제 이야기가 하도 많이 올라와서 궁금했거든... 저녁부터 살짝 몸살기가 돌아서 안 갔는데...”
생각지 못했던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철렁하는 가슴을 쓸어내림과 동시에 죄책감이 들었다. ‘내 자식 일만 아니면 된다‘는 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면의 안도감 뒤로 먹구름처럼 뒤덮는 무거운 마음의 정체를 알 길도, 피할 길도 없었다.
스스로 그 마음을 물으며 맞은 지난해 겨울은 유난히 길고 힘들었다. 문득문득 지켜주지 못하고 떠나보낸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슬픔의 터널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던 중 1월 28일 치유자, 정혜신 선생님과 함께한, ‘당신이 옳다’ 100일 프로젝트로 맺어진 ‘한빛의 친구들’ 정기 모임에 참석했다. 정혜신 선생님을 비롯한 30여 명의 참석자가 오랜만에 친정을 방문하는 듯 들뜨고 설레는 마음으로 갖가지 먹거리를 손에 손에 들고 한빛센터에 모여들었다. 한빛 엄마, 김혜영 샘은 자살 유가족 협회 회원 중 세 분의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참석하셨다.
센터의 휴일이었지만 김영민 센터장님과 송하민 사무차장님도 일찌감치 출근하여 한빛 아빠, 이용관 선생님과 함께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행사가 시작되자 세 분은 먼저 인사를 나눈 뒤 이태원 참사 100일 행사 참여차 자리를 뜨셨다. 일상을 살아내느라 참사의 슬픔에 오로지 집중하지 못했던 빈 시간들을 지켜가는 분들이 계심을 알게 되어 숙연했다.
“오늘 이 자리에 왜 오게 되었을까요?”라는 정혜신 선생님의 질문에 참석한 모두가 돌아가며 한 마디씩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를 만나러 왔다’, ‘형편이 허락지 않음에도 마음이 끌려서 무작정 질렀다’, ‘친정 찾듯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왔다’, ‘숨 고르기 위해 왔다’, ‘내 아이 한 사람만이라도 거침없이 사랑하고 싶어서 왔다’ 등 돌아가며 저마다의 이유를 말했다. 김혜영 선생님은 ‘세 분의 유가족 어머니들이 빨리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에 함께 참석했다’고 하셨다. 유가족 어머니 중 한 분은 ‘여러분의 살아가는 모습이 참 아름다워요. 살아있는 동안 많이 사랑하세요’라고 이야기 들은 소감을 전하기도 하셨다. 또 한 분은 ‘이 모임에서 울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한 편안함을 느낀다’고 하셨다. 서로의 마음에 자기 마음을 잇대 가지를 치듯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한 배에 실려 굽이굽이 파도를 타듯 함께 울고 웃으며 밤 아홉 시를 훌쩍 넘겼다.
그 과정에서 나는 겨우내 덮친 무거운 마음의 실체를 바라보기도 했다. 오랜 알콜 의존으로 ‘폐인’이라 불리며 거리를 헤매다가 내가 열일곱 살 되던 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라는 존재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밑천이라고는 뼈대 있는 가문이라는 자존심 하나뿐인 한 집안의 장손이자 오남매의 아버지로 겹겹이 어깨가 무겁고 외로웠던 아버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오랜 죄책감이 내면의 어두운 밀실에 독사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봐야 어린 고등학생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라는 판단의 말 뒤로 ‘병들어 죽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마음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순간순간 독기를 내뿜곤 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저마다 겪어온 상실의 아픔을 듣고 도닥이다 보니 나를 향한 독사의 혀가 어느새 보드라운 솜털이 되어 상처 입은 마음을 포근하게 감쌌다.
정혜신 선생님은 ‘죽음’ 또한 ‘삶’의 일부라고 하셨다.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있는 자와의 관계는 계속되기에 죽음이 곧 한 존재의 끝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0년이 넘게 나는 아버지와 수많은 이야기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 이야기들이 두렵고, 어둡고, 무거웠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막연한 존재를 향한 독백 같이 여겼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살아 있는 존재 간의 관계만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죽음 이후의 관계도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아버지와 주고받은 수많은 사랑의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 안의 어린 소녀가 안타깝게 놓쳤던 아버지와의 사랑의 끈을 다시 붙잡자 대상을 찾지 못해 막막하게 스스로를 향하던 독설이 그 방향을 제대로 돌려 통렬히 질문 할 수 있었다.
“배우지 못하고 힘없는 한 가장의 무거운 어깨를 이 사회는 왜 품어주지 않았을까?”
이토록 무정한 사회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상실의 트라우마를 함께 마주하자 우리는 어느새 기적처럼 ‘사랑’이라는 하나의 마음으로 군무를 추듯 모여들었다.
“이제 용기 내어 사랑으로 성큼 다가갈래요”라는 한 참석자의 마무리 소감으로 우리 모두의 가슴에 환한 희망의 등이 켜졌다. 함께하는 내내 ‘이 미친 세상의 어디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라는 한빛의 간절한 당부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생생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