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미디어 현장에는 작품의 완성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열정을 쏟는 종사자 여러분이 계십니다. 이에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방송미디어 현장의 '더 아래로, 더 옆으로' 빛을 비추어 이들의 삶을 마주하고자 합니다. 방송일터에서의 나의 삶을 함께 이야기나눌 분들이 많아지길 바라며, 저희 센터 또한 '한빛이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통해 더 나은 방송미디어 노동 현장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빛이 만난 사람들> 네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함께 한 사람들
인터뷰이 : 방송 연출가 D님 / 인터뷰어 : 김희라 기획차장
내용각색 : 김희라 기획차장
소개말
《한빛이 만난 사람들》 네 번째 인터뷰 주인공은 10여 년간 활약한 방송 연출가 D님입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모두가 선망하던 PD로서 10여 년간 살아온 D님의 이야기를 통해 방송미디어 산업의 변화 점과 개선점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세상에 메시지를 던질 줄 아는 삶을 위해
그는 세상에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D에게 ‘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물었다. D는 이렇게 답했다. “부모님께서 배움을 오래 하지 못하셔서 글을 잘 못읽으세요... 하지만 글을 못 읽는다고 해서 말을 못하거나, 보지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의식하진 않았지만, 나 스스로가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람들에게 뜻깊은 메시지를 보다 쉬운 방법으로 전달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라고.
일상적 계기를 통해 꿈을 갖게 된 D는 ‘세상에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꿈에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이따금 있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마침내 4년 여라는 시간이 흘러, D는 ‘언론고시’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1만 시간의 법칙’과 ‘전문가’
그토록 원했던 연출가로 나아가기까지 그 과정은 매우 험난했다. 잘 시간조차 없던 D는 며칠씩 밤샘 업무를 하기 일쑤였다. 쪽잠마저 잘 수 없는 극한의 현실에 D는 자조가 섞인 우스갯소리를 동료에게 던지기도 했다. ‘1만 시간을 훈련하면 전문가라는데, 우린 그럼 3년 차에 이미 전문가가 되어있겠네. 근데 그렇게 한들 누가 우리를 연출 전문가라고 불러주겠냐.’라며...
D는 이 이야기를 전하며 쉼 없이 돌아가는 모터도 얼마 안가 고장 나는 것처럼, ‘잘 쉬는 것’과 일을 ‘잘하는 것’의 균형이 이뤄지도록 방송계 전반이 고민하고 변화를 주도해야, 한 발짝 앞으로 갈 수 있음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폭력적인 일상과 자기 학대의 답습
D에게 있어 10여 년의 연출 생활을 정연하게 정리해 이야기하기엔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D에게 잊히지 않는 중심 기억이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D는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꺼내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찰나의 침묵 끝에 D는 이야기를 꺼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니 배치 예정이었던 부서가 공중분해 되어, 생각지 못했던 장르의 부서로 배치될 것을 통보받은 일이었다. D는 이 상황이 상식적이지 않았지만, 4년이 넘는 동안 준비했던 ‘언론고시’의 합격 목걸이를 쉽게 벗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전한 부서에는 D와 입사 시기가 비슷한 외주사 출신 선배 PD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선배 PD는 D를 ‘실력도 없는 공채 출신이 대감질 한다’, ‘실력도 없으면서 돈만 받아 가는 혜택받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열등감을 꾹꾹 눌러 담은 폭언을 일삼았다고 했다. 필자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방송 현장 파악하는 시간도 부족한 신출내기가 어찌 그랬겠냐.’며 선배 PD에게 되물어 보고 싶은 순간이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선배 PD가 폭력적인 일상을 주도했다면, 또래 동료들은 현장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적인 일상을 ‘고쳐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이라며 불합리에서 스스로를 꺼내지 못한 채 자기 학대의 상황을 노출했다. 그리고 불합리한 현장을 견디다 떠난 동료들을 ‘낙오자’, ‘약한 사람’이라 낙인을 찍으며 자신이 버텨낸 것을 과시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경험을 수도 없이 접하다 보니, D는 “회사 내에서 직접 맞닿아 일한 사람만 해도 수백 명이었지만, 그중 믿고 따를 수 있던 사람이 있었을지 모르겠다.”며 깊은 실망으로 말을 맺었다.
선망하던 삶에서 내려오던 순간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마침내 꿈을 이룰 수 있는 자리에 올라섰지만, 그럴듯했던 겉모습과는 사뭇 달랐던 현실을 마주했던 D. 타인들이 선망하는 위치에 다다른 D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윤리적이지 못한 현장의 경계에서 D는 지쳐갔다.
그리고 이내 D는 10여 년간 방송 연출가로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좋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버티고 있는 지금, 가장 열심히, 잘하면 마침내 될 것’이라는 고통스러운 주문을 하던 스스로가 사라진 순간이었다.
투명한 현장, 존중하는 현장으로의 발돋움이 필요할 때
마지막으로 D는 남아있는 동료들이 방송 현장에서의 삶을 더욱 건강하고 보람차게 이루려면, 방송 현장이 보다 ‘투명하게 현장을 운영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기본적으로 장착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불투명한 현장 운영이 당연시되고 폭력적이고 수직적인 의사결정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이가 개선되지 않으면 역량 있는 동료들이 머지않아 모두 현장을 떠나게 되고, 방송의 질은 떨어지게 될 것이기에 반드시 개선해야만 함을 힘주어 이야기했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D의 눈빛에서 방송 현장이 더 나아지고 발전하기를 누구보다 간절하게 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빛을 내어준 D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함께 한 사람들
인터뷰이 : 방송 연출가 D님 / 인터뷰어 : 김희라 기획차장
내용각색 : 김희라 기획차장
소개말
《한빛이 만난 사람들》 네 번째 인터뷰 주인공은 10여 년간 활약한 방송 연출가 D님입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모두가 선망하던 PD로서 10여 년간 살아온 D님의 이야기를 통해 방송미디어 산업의 변화 점과 개선점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세상에 메시지를 던질 줄 아는 삶을 위해
그는 세상에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D에게 ‘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물었다. D는 이렇게 답했다. “부모님께서 배움을 오래 하지 못하셔서 글을 잘 못읽으세요... 하지만 글을 못 읽는다고 해서 말을 못하거나, 보지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의식하진 않았지만, 나 스스로가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람들에게 뜻깊은 메시지를 보다 쉬운 방법으로 전달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라고.
일상적 계기를 통해 꿈을 갖게 된 D는 ‘세상에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꿈에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 이따금 있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마침내 4년 여라는 시간이 흘러, D는 ‘언론고시’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1만 시간의 법칙’과 ‘전문가’
그토록 원했던 연출가로 나아가기까지 그 과정은 매우 험난했다. 잘 시간조차 없던 D는 며칠씩 밤샘 업무를 하기 일쑤였다. 쪽잠마저 잘 수 없는 극한의 현실에 D는 자조가 섞인 우스갯소리를 동료에게 던지기도 했다. ‘1만 시간을 훈련하면 전문가라는데, 우린 그럼 3년 차에 이미 전문가가 되어있겠네. 근데 그렇게 한들 누가 우리를 연출 전문가라고 불러주겠냐.’라며...
D는 이 이야기를 전하며 쉼 없이 돌아가는 모터도 얼마 안가 고장 나는 것처럼, ‘잘 쉬는 것’과 일을 ‘잘하는 것’의 균형이 이뤄지도록 방송계 전반이 고민하고 변화를 주도해야, 한 발짝 앞으로 갈 수 있음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폭력적인 일상과 자기 학대의 답습
D에게 있어 10여 년의 연출 생활을 정연하게 정리해 이야기하기엔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D에게 잊히지 않는 중심 기억이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D는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꺼내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찰나의 침묵 끝에 D는 이야기를 꺼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니 배치 예정이었던 부서가 공중분해 되어, 생각지 못했던 장르의 부서로 배치될 것을 통보받은 일이었다. D는 이 상황이 상식적이지 않았지만, 4년이 넘는 동안 준비했던 ‘언론고시’의 합격 목걸이를 쉽게 벗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전한 부서에는 D와 입사 시기가 비슷한 외주사 출신 선배 PD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선배 PD는 D를 ‘실력도 없는 공채 출신이 대감질 한다’, ‘실력도 없으면서 돈만 받아 가는 혜택받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열등감을 꾹꾹 눌러 담은 폭언을 일삼았다고 했다. 필자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방송 현장 파악하는 시간도 부족한 신출내기가 어찌 그랬겠냐.’며 선배 PD에게 되물어 보고 싶은 순간이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선배 PD가 폭력적인 일상을 주도했다면, 또래 동료들은 현장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적인 일상을 ‘고쳐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이라며 불합리에서 스스로를 꺼내지 못한 채 자기 학대의 상황을 노출했다. 그리고 불합리한 현장을 견디다 떠난 동료들을 ‘낙오자’, ‘약한 사람’이라 낙인을 찍으며 자신이 버텨낸 것을 과시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경험을 수도 없이 접하다 보니, D는 “회사 내에서 직접 맞닿아 일한 사람만 해도 수백 명이었지만, 그중 믿고 따를 수 있던 사람이 있었을지 모르겠다.”며 깊은 실망으로 말을 맺었다.
선망하던 삶에서 내려오던 순간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마침내 꿈을 이룰 수 있는 자리에 올라섰지만, 그럴듯했던 겉모습과는 사뭇 달랐던 현실을 마주했던 D. 타인들이 선망하는 위치에 다다른 D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윤리적이지 못한 현장의 경계에서 D는 지쳐갔다.
그리고 이내 D는 10여 년간 방송 연출가로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좋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버티고 있는 지금, 가장 열심히, 잘하면 마침내 될 것’이라는 고통스러운 주문을 하던 스스로가 사라진 순간이었다.
투명한 현장, 존중하는 현장으로의 발돋움이 필요할 때
마지막으로 D는 남아있는 동료들이 방송 현장에서의 삶을 더욱 건강하고 보람차게 이루려면, 방송 현장이 보다 ‘투명하게 현장을 운영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기본적으로 장착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불투명한 현장 운영이 당연시되고 폭력적이고 수직적인 의사결정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이가 개선되지 않으면 역량 있는 동료들이 머지않아 모두 현장을 떠나게 되고, 방송의 질은 떨어지게 될 것이기에 반드시 개선해야만 함을 힘주어 이야기했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D의 눈빛에서 방송 현장이 더 나아지고 발전하기를 누구보다 간절하게 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빛을 내어준 D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