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경쟁이 무한한 불안이 되지는 않게 _ 예능 작가 R

202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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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방송미디어콘텐츠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들어갑니다. 그런 현장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갑니다. 여러 직군에 있는 종사자들을 만나, 일에 대한 이야기와 고민, 꿈과 보람, 함께 바꾸고자 하는 가능성까지 함께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한빛이 만난 사람들> 열아홉 번째 이야기입니다.




이번에 《한빛이 만난 사람들》 만난 분은 예능 프로그램의 A to Z를 도맡고 계신 예능작가 R님 입니다.

 

함께 한 사람들

인터뷰이 : 예능작가 R / 인터뷰어 : 김희라 기획차장

내용각색 : 김영민 센터장

 

예능작가는 무슨 일을 할까

예능작가가 하는 일에 대해서 R은 사방의 뻗은 일들을 모두 흡수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표현한다. 물론 원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출연자가 나오고, 출연자가 방문하는 동네가 있고, 식사하는 장소가 있고, 산책길이 있다면, 그 모든 것에 대한 데이터베이스 자료를 다 작가들이 만든다는 것이다. 출연자를 정하거나, 어떤 장소를 가는 것에 대해서 PD가 결정하거나 제안할 수는 있어도 결국 작가들의 손을 거친다. 출연자 자료 조사, 서울 시내의 가볼 만한 자료 조사, 마포구 안에서 가볼 만한 식당에 대한 자료 조사 그리고 거기 안에서 도보로 가볼 만한 가장 가까운 카페도 목록을 만들고 섭외도 하는 것이다.

“직업을 말씀드리고 나면 예능 작가는 뭐 하냐고 물어요. 흔히 대본을 쓴다고 생각하시는데, 대본을 쓸 수 있는 데이터가 될 수 있는 자료들은 다 작가가 찾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일반인 출연자 한 명을 출연시키려면 몇 십 명에서 몇 백 명도 찾아요. 만약에 매주 일반인 출연자를 찾아야 하면 이를 찾아서 사전 인터뷰하고, 현장에서 출연자 관리까지도 하죠.”

문서를 작성해서 뭔가 도출해야 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순전히 작가의 몫이다. 회의를 하다가 예를 들어 자료 조사를 한다면 종로 어디가 좋다거나, 요즘 서점이 뜬다는 정도 얘기는 PD들과 기획 회의를 하다보면 잠깐 오갈 수 있지만, 이를 다 갈무리해서 자료화하고 문서화하고 더 많은 자료들을 첨부해가지고 우리가 놓치는 것 없게끔 문서화하는 건 작가들이 하는 것이다. 영상은 PD가 책임지고, 문서는 작가가 책임진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편집이나 예고편에 자막을 짜는 것을 같이 하거나, 편집한 영상에 의견을 주는 역할을 요구받을 때도 있다. 짧은 시간에 방대한 양의 자료 조사를 완성도 높게 수행해야만 한다.

 

기획이 엎어지면 증발하는 임금

“요즘 종합소득세 신고 기간이잖아요. 작년에 모 방송사에서 일을 했는데 소득이 1400만 원이었어요. 월 소득이 아니라, 연 소득이요. 프로그램 준비에 들어갔다가 편성이 되지 않고 무산된 팀이 3개였고, 방영이 된 게 하나였어요.”

R은 프로그램이 무산되어 기획비를 받지 못하는 일이 작가들에게 비일비재하다고 말한다. 기획을 위해서 회의를 하고 자료 조사를 하고 준비를 하여도,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이유이다. 결과물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그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팀의 책임은 당연히 아니다. 특히 최근에는 광고계가 위축되면서 프로그램 제작이 많이 위축되었고, 방송을 시작하고도 즉각적인 시청자 반응이 좋지 않다면 조기에 종영을 결정한다. 종영이 최종 결정되는 순간까지는 이번에는 그래도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며 희망고문을 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한다.

“작가들이 받는 임금을 바우처라고 해요. 작가들은 계약서를 쓰고 일을 시작하지 않고 일을 하다 편성이 나온 계약서를 써요. 그 계약서에 프로그램명과 편성 시간과 금액이 나와 있으니까 (...) 그래서 기획을 하다 무너지고 하다 무너졌던 기간에 스쳐갔던 채널과 프로그램명은 있었지만, 수입도 없고, 이력서에 넣을 만한 신규 프로그램 런칭 소식도 없었죠.”

프로그램이 편성되면 보통 주급을 기준으로 책정되는 작가의 임금은 책정되지만, 기획기간에 대해서 지급하는 기획료는 저연차에서는 그대로 지급하고, 고연차에서는 비율을 낮추는 방식으로 책정되어 있다. 주급은 연차에 비례하여 책정되어 있어서 저연차에서는 상당히 낮으니, 경력 5년차까지는 기획료를 주급의 100%로 하고, 그보다 높은 연차에서는 조금씩 깎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간 연차에서는 임금의 역전도 생기게 된다. 바우처라는 명칭에서 느낄 수 있듯이, 작가들의 임금은 인건비가 아니라 제작비로 취급되고, 그러다보니 통상적인 임금체계와는 다른 미묘한 문제들을 발생시킨다.

예능은 시즌제 방식이 늘어나서 중간 중간 다시 다음 시즌을 기획하는 기간이 생기고, 프로그램의 스케일도 커져서 기획하는 기간이 길어지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 시기에 공짜로 부려먹을 수 없으니, 기획료를 지급하기는 한다. 그마저도 일한 기간을 모두 지급하지도 않는다. 석 달을 넘게 일해도 두 달 치만 지급하기도 한다. 준비의 완성도를 높이려면 시간이 필요하지만, 일한 기간이 길어질수록 월급은 오히려 줄어드는 셈이다. R은 사측에서 가장 부담되지 않는 수치들로 말장난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열심히 성실하게 일했는데

R은 처음에는 100만원 조금 넘는 월급을 받으면서, 새벽같이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해서 택시비로만 70만원을 쓰면서도 일을 배우는 기간이라고 생각하라는 주변의 말만 듣고, 사회생활은 다 이런 건가라고 생각하며 버텼다. 경력이 어느 정도 차고, 서른이 되어서도 통장에 모은 돈도 없다보니, 어떤 프로그램으로 가야 할까를 많이 고민하는 시기였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갈 수 있는 프로그램 자체가 없지 않았는데, 종편이 생기고, 최근에는 유튜브 쪽 방송 영역도 새롭게 생겼어도, 막상 갈 수 있는 선택지는 별로 없다보니, 여전히 막내 작가 때와 다를 바 없이 계속 살고 있는 것 같고, 요즘은 일을 한 날보다 안 한 날이 더 많다보니 작가로서의 진로 자체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한다.

“열심히 살았는데, 성실하게 산 줄 알았는데, 지금도 걱정스럽고 내일도 걱정스러운 이런 삶이 괜찮은가 싶고. 근데 그러다 보면 정말 억울해요. 나 진짜 열심히 살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다는 것에는 남들 잘 때 못 자고, 남들 먹을 때 못 먹고. 정말로 촬영 같은 게 너무 연달아 이어지면, 중간에 화장실 갈 틈도 없는 거예요. ‘언니 저 지금 생리대 세 개 붙이고 있는데 피 쏟아지는 느낌이 나는데 그 와중에 옷 버릴까 봐 너무 무서워요’ 이러는 거죠. 근데 진짜 그러다 보면 옷 버리게 되는 날도 생겨요.”

매일매일 우리가 촬영장 안에서 일하면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책임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하는 일들이 굉장히 많이 있는데, 그렇게 살아온 현실이 이건가 하는 생각에 허탈함이 든다. 자신을 보호해주는 제도가 없으니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다고 느낀다. 개선을 요구하면, ‘그래 다음에는 너랑 일 안 해야겠구나’가 되는 걸 알기 때문에, 갈수록 더 폐쇄적이고 떠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진다고 R은 말한다. 결국 어디든 함께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내야만 바뀌는 것이지만, 그러한 용기를 내는 것이 더 수월할 수 있어야 하겠다.

 

조금씩 나아지기를

R은 시사하고 본방에 나가는 것까지 살펴보는 것을 작가의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임금을 줄이고자 녹화 이후의 과정은 PD들의 몫으로 보거나 메인 작가 또는 2nd 작가까지만 남아서 시사를 하는 방식이 요즘 들어서 생기고 있다고 한다. 모 유명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는 주된 업무가 사람을 섭외하는 일이어서, 기획비를 100% 지급하였지만, 본 녹화가 마무리된 후에는 시사 과정에서는 작가들은 빠졌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합리적일 수도 있지만, 작가들은 자신이 제작에 참여한 방송에 대해 시청자 입장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방송을 제작하면서 생기는 수없이 많이 가지 쳐지는 일들이 다 작가들이 도맡게 되는 것은 여전하다. 예를 들면 DM으로 이벤트를 할 때 그 DM 이벤트를 수령할 아이디를 찾는 것조차도 계정 아이디를 받아서 연락하는 일도 한다. ‘방송 안에서도 늘 책임질 사람을 찾고 어찌 됐든 우리 프로그램 안에서 해내야 될 일이니까’라고 생각하며 다 해왔고, 또 위축되는 방송 산업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든다고 R은 말한다.

연차가 올라가면 임금 수준도 10년 넘게 제자리인 점도 작가 일을 하다가 떠나게 하는 요인이라고 한다. 자신이 일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막내 작가의 임금은 올랐지만, 가령 15년차 작가의 임금은 그대로라고 한다. 그 와중에 출연자의 출연료는 몇 배 이상 올랐지만, 제작비가 없어서 방송 작가한테 줄 돈이 없다는 얘기는 쉽게 듣는다. 출연자에 목맬 수밖에 없는 방송의 생리는 알고 있지만, 너무 작가는 팽개쳐놓고 쓰는 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90년대 초에 작가 일을 시작하셨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당시에는 방송작가의 처우는 어느 대기업에 밀리지 않았던 시절이었다는데, 지금은 고소득을 받는 방송작가는 정말 극소수인 것이 현실이다.

“무료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 그리고 한 회 차에 방영되는 시간에 따른 적정한 임금 수준 등에 대한 강력한 가이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국가나 정부에서 관심 가져주지 않으면 계속 이 상태로 유지될 거고 저는 이 변화도 굉장히 요원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계약서가 생기고 고용보험 가입도 많아지는 점은 10년 전과 비교하면 그래도 나아지고 있다고 느낀다면서도, R은 구조적인 개선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계약서가 요식행위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문제가 생기면 증거로서 제출할 수 있는 효력이 있는 문서’라며, 비록 느리더라도 작가들이 기댈 수 있는 제도적 안전망이 하나하나 생기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는다면 이 일자리에서 하나 둘 튕겨 나가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시청률보다 더 적나라한 조회 수로 콘텐츠 무한 경쟁이 반복되는 것이 요즘에 방송 업계이다. 아무리 평생 직업이 없는 시대이어도, 모든 무한 경쟁이 일하는 이들의 무한한 불안이 되지 않도록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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