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김혜영
고맙습니다(2) - 신부님, 신부님
한빛 한솔이가 대학생이 된 후 의정부 신곡2동 성당에 꼭 가고 싶었다. 신곡2동 성당에 예수님이 특별히 따로 계신 것도 아닌데 ‘덕분에 이렇게 잘 컸어요.’ 하고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었다. 의정부를 떠난 지 15년이나 지났기에 우리 가족을, 두 아이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을 텐데도 이상하게 두 아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이곳, 신곡2동 성당에는 꼭 들러야만 할 것 같은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친정 부모 묘소를 가려면 신곡2동 성당 앞을 지나는데 그때마다 돌아올 때 꼭 들러야지 했다. 하지만 매번 무엇이 그리 바쁜지 시간에 쫓겨 다음으로 미루며 지나가곤 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었던 그곳을 한빛 유골함을 안고 찾아 갔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건가?
“사비나, 안 될 것 같아. <하늘의 문>에는 본당 신자만이 들어갈 수 있대. 저녁에 신부님과 협의해 본다니까 기도하며 기다려보자” 성당 자매님이 위로했지만 나는 아무 간절함이 없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넋이 나갔는데 무슨 기도를? 아들이 이 세상에 없는데 장지가 어디가 되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나 장례는 진행되었고 모든 절차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밤늦게 아들의 복사시절 얘기를 들으신 주임신부님께서 선뜻 <하늘의 문>을 허락하셨다는 연락이 왔다. 한빛은 첫영성체를 받았고 복사를 섰던 신곡2동 성당의 봉안당 <하늘의 문>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한빛의 죽음을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동안 분에 넘치게 모든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이 성당에 우선적으로 왔어야 했는데 나의 게으름으로 차일피일 미루어 벌 받은 것일까? 그동안 눈앞의 것에만 집착하고 세상의 욕심만 채우려고 해서 나의 교만함에 철퇴를 내렸나? 별별 자책감이 다 들었다. 그래도 아니지. 아무리 죄가 커도 엄마를 가르치기 위해 아들의 죽음으로 경고를 해서는 안 되지. 아들을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 이치가 그렇다면 무슨 자비의 하느님이고 사랑의 하느님이란 말인가?
오순절. 한빛이 하늘나라로 간 지 50일 되던 날. 그때까지도 나는 숨죽인 채 절망 속에서 한빛의 죽음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나 장례를 경황없이 치뤄 한빛에게 미안했기에 늦었지만 이제라도 한빛을 편안하게 보내고 싶었다. 그래야 나도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생각만 하고 무작정 신곡2동 성당에서 오순절 추도식을 하고 싶다고 했다. 참 불편한 부탁이었을 텐데 신부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배려해주셨다. 30여년 넘게 학교에 근무해봐서 안다. 이런 배려가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가를. 연민이나 측은지심 갖고도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고마웠다.
한빛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회사측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은 후 경과 발표 및 추모제-‘이한빛PD를 잊지 않겠습니다.(2017.7.2)를 위한 장소가 다시 논의 되었다. 또 성당에 부탁드리기에는 염치가 없었다. 천주교회 신자라서 성당의 구조를 알고 있기에 더 이상의 요구는 드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적절한 공간인 소성전에서는 그날 주임신부님 은경축일 행사가 있었다. 다른 대안이 없어 우왕좌왕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임신부님께서 “그럼 대성전에서 하세요.” 하셨다. 한 번도 아니고 정말 죄송했다. 내 생애에 이렇게 민폐를 끼치며 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참 뻔뻔스럽게도 사는구나. 부끄러웠다. 그러나 엄마로서 한빛한테 더 이상 미안하지 않고 싶었다. 이제 정말 편안하게 보내고 싶었다. 결국 내 개인적인 생각에만 매몰되어 앞뒤 돌아보지 못하고 욕심을 낸 꼴이었는데도 신부님께서 따듯하게 안아주셨다. 추모제에는 약 450여명이 함께 해 주셨다. 버스 두 대로 서울에서 일부러 와 준 익명의 시민들과 청년들, 한빛 한솔 친구와 후배들, 그리고 지인들. 대성전이 아니었으면 힘들 뻔 했다. 이 모든 진행상황이 오묘했다. 한빛 장례를 치루고 무작정 성당문을 두드렸을 때 지푸라기를 잡게 해주신 협력신부님께서 추도사를 해주셨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신 주임신부님께서도 뒤에서 지켜보시며 힘을 주셨다. 덕분에 한빛은 편안하게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동사목위 J신부님과 L신부님. 늦게 알아 미안하다며 전화를 주시고 만나자고 하셨다. 매일 금방 해결될 수 없는 노동관련 사안에 시달리시며 바쁘실 텐데도 전철을 타고 멀리 도봉동까지 오셔서 우리 가족을 위로하셨다. 한빛을 위해 150단 기도를 하셨다며 그 귀한 묵주를 주신 B신부님. 가족이 진상규명을 온 몸으로 외쳐도 더욱 견고해지던 괴물 앞에서 아무 희망이 없어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팠을 때 횡설수설 면담요청을 받아주신 K신부님과 H신부님.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생명의 끈이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발버둥 칠 때 말없이 다가오셔서 건네주신 신부님의 신앙서적. 나에게 신부님이 안 계셨더라면 한빛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었을까? 견디어낼 수 있었을까?
신부님들은 공인이고 나만 생각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은 간절해도 다가가기가 어렵다. 한 신자의 고통이 아무리 커도 가족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받아주고 해결해줄 수도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랬기에 나에게는 신부님들이 모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셨다. 2014년 교황님이 방한하셨을 때 노란 리본을 다신 것을 보고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란 리본을 떼라고 조언을 하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엄청난 슬픔 앞에선 중립적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그 어느 누구도 고통과 불의에는 중립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었다. 나는 울컥했었다. 내가 그 슬픔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때. 나는 교황님의 그 말씀을 가슴 뜨겁게 새기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결심했었다.
한빛이 월급을 세월호 등 고통 받는 곳에 기부한 것을 보고 한빛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한빛이 떠난 후 알았다. 그때 한빛과 이 말을 하면서 서로에게 따듯한 위로를 할 걸, 세상은 그래도 살 만 하다고 말할 걸.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생각을 가진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다고 말해줄 걸. 나는 그러지 못했다.
- 엄마 김혜영
고맙습니다(2) - 신부님, 신부님
한빛 한솔이가 대학생이 된 후 의정부 신곡2동 성당에 꼭 가고 싶었다. 신곡2동 성당에 예수님이 특별히 따로 계신 것도 아닌데 ‘덕분에 이렇게 잘 컸어요.’ 하고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었다. 의정부를 떠난 지 15년이나 지났기에 우리 가족을, 두 아이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을 텐데도 이상하게 두 아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이곳, 신곡2동 성당에는 꼭 들러야만 할 것 같은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친정 부모 묘소를 가려면 신곡2동 성당 앞을 지나는데 그때마다 돌아올 때 꼭 들러야지 했다. 하지만 매번 무엇이 그리 바쁜지 시간에 쫓겨 다음으로 미루며 지나가곤 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었던 그곳을 한빛 유골함을 안고 찾아 갔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건가?
“사비나, 안 될 것 같아. <하늘의 문>에는 본당 신자만이 들어갈 수 있대. 저녁에 신부님과 협의해 본다니까 기도하며 기다려보자” 성당 자매님이 위로했지만 나는 아무 간절함이 없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넋이 나갔는데 무슨 기도를? 아들이 이 세상에 없는데 장지가 어디가 되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나 장례는 진행되었고 모든 절차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밤늦게 아들의 복사시절 얘기를 들으신 주임신부님께서 선뜻 <하늘의 문>을 허락하셨다는 연락이 왔다. 한빛은 첫영성체를 받았고 복사를 섰던 신곡2동 성당의 봉안당 <하늘의 문>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한빛의 죽음을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동안 분에 넘치게 모든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이 성당에 우선적으로 왔어야 했는데 나의 게으름으로 차일피일 미루어 벌 받은 것일까? 그동안 눈앞의 것에만 집착하고 세상의 욕심만 채우려고 해서 나의 교만함에 철퇴를 내렸나? 별별 자책감이 다 들었다. 그래도 아니지. 아무리 죄가 커도 엄마를 가르치기 위해 아들의 죽음으로 경고를 해서는 안 되지. 아들을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세상 이치가 그렇다면 무슨 자비의 하느님이고 사랑의 하느님이란 말인가?
오순절. 한빛이 하늘나라로 간 지 50일 되던 날. 그때까지도 나는 숨죽인 채 절망 속에서 한빛의 죽음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나 장례를 경황없이 치뤄 한빛에게 미안했기에 늦었지만 이제라도 한빛을 편안하게 보내고 싶었다. 그래야 나도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생각만 하고 무작정 신곡2동 성당에서 오순절 추도식을 하고 싶다고 했다. 참 불편한 부탁이었을 텐데 신부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배려해주셨다. 30여년 넘게 학교에 근무해봐서 안다. 이런 배려가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가를. 연민이나 측은지심 갖고도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고마웠다.
한빛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회사측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은 후 경과 발표 및 추모제-‘이한빛PD를 잊지 않겠습니다.(2017.7.2)를 위한 장소가 다시 논의 되었다. 또 성당에 부탁드리기에는 염치가 없었다. 천주교회 신자라서 성당의 구조를 알고 있기에 더 이상의 요구는 드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적절한 공간인 소성전에서는 그날 주임신부님 은경축일 행사가 있었다. 다른 대안이 없어 우왕좌왕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임신부님께서 “그럼 대성전에서 하세요.” 하셨다. 한 번도 아니고 정말 죄송했다. 내 생애에 이렇게 민폐를 끼치며 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참 뻔뻔스럽게도 사는구나. 부끄러웠다. 그러나 엄마로서 한빛한테 더 이상 미안하지 않고 싶었다. 이제 정말 편안하게 보내고 싶었다. 결국 내 개인적인 생각에만 매몰되어 앞뒤 돌아보지 못하고 욕심을 낸 꼴이었는데도 신부님께서 따듯하게 안아주셨다. 추모제에는 약 450여명이 함께 해 주셨다. 버스 두 대로 서울에서 일부러 와 준 익명의 시민들과 청년들, 한빛 한솔 친구와 후배들, 그리고 지인들. 대성전이 아니었으면 힘들 뻔 했다. 이 모든 진행상황이 오묘했다. 한빛 장례를 치루고 무작정 성당문을 두드렸을 때 지푸라기를 잡게 해주신 협력신부님께서 추도사를 해주셨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신 주임신부님께서도 뒤에서 지켜보시며 힘을 주셨다. 덕분에 한빛은 편안하게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동사목위 J신부님과 L신부님. 늦게 알아 미안하다며 전화를 주시고 만나자고 하셨다. 매일 금방 해결될 수 없는 노동관련 사안에 시달리시며 바쁘실 텐데도 전철을 타고 멀리 도봉동까지 오셔서 우리 가족을 위로하셨다. 한빛을 위해 150단 기도를 하셨다며 그 귀한 묵주를 주신 B신부님. 가족이 진상규명을 온 몸으로 외쳐도 더욱 견고해지던 괴물 앞에서 아무 희망이 없어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팠을 때 횡설수설 면담요청을 받아주신 K신부님과 H신부님.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생명의 끈이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발버둥 칠 때 말없이 다가오셔서 건네주신 신부님의 신앙서적. 나에게 신부님이 안 계셨더라면 한빛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었을까? 견디어낼 수 있었을까?
신부님들은 공인이고 나만 생각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은 간절해도 다가가기가 어렵다. 한 신자의 고통이 아무리 커도 가족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받아주고 해결해줄 수도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랬기에 나에게는 신부님들이 모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셨다. 2014년 교황님이 방한하셨을 때 노란 리본을 다신 것을 보고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란 리본을 떼라고 조언을 하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엄청난 슬픔 앞에선 중립적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그 어느 누구도 고통과 불의에는 중립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었다. 나는 울컥했었다. 내가 그 슬픔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때. 나는 교황님의 그 말씀을 가슴 뜨겁게 새기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결심했었다.
한빛이 월급을 세월호 등 고통 받는 곳에 기부한 것을 보고 한빛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한빛이 떠난 후 알았다. 그때 한빛과 이 말을 하면서 서로에게 따듯한 위로를 할 걸, 세상은 그래도 살 만 하다고 말할 걸.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생각을 가진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다고 말해줄 걸. 나는 그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