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김혜영
고맙습니다(1) - 청년유니온
그동안 내 슬픔에 젖어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는 게 아니라 더욱 진하게 기억되는 사람들...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떠올라 혼자서 ‘고맙습니다’ 하고 읊조린다. 버스 차창밖으로 보이는 무심한 표정의 사람들을 볼 때도 그네들이 떠올라 가슴이 뜨거워진다. 여기 저기 이곳 저곳 곳곳에 그네들이 있다. 바람이 휙 불듯 한빛이 가슴을 치고 가면 어김없이 그네들은 그림자처럼 따라와 나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한다. ‘그래 갚아야지. 나는 한빛엄마니까. 해야 할 일이 그래서 많은데 이렇게 징징대고만 있어서는 안 되지’ 하며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네들은 나를 다시 일으키고 일어서게 한다. 그 많은 고마운 사람들과 단체들. 다 기억하고 내가 죽는 날까지 잊지 않고 기도하고 싶은데 경황없던 때라서인가 생각이 다 안 난다. 절대로 잊으면 안 되니까 안간힘을 쓰며 하나하나 시간을 되돌려 더듬어 보지만 기억이 힘들다. 미안하다.
가장 긴박했던 순간, 가장 암울했던 시간을 깨며 다가왔던 <청년유니온>과 연대해 준 35개 단체의 대책위는 아직도 내 가슴속에 큰 바위로 든든하게 남아있다. 그네들은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시작부터 용기를 주며 손잡아 주었고 엄마인 나보다 한빛의 고민을 더 깊게 끌어내 알려주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노동조합이란 단어에는 익숙했지만 유니온은 낯설었기에 당연히 <청년유니온>이 존재하는지조차도 몰랐다. <청년유니온>은 노동조합을 가지지 못한 수많은 청년들에게 청년유니온이란 가능성을 전하며 새로운 노동을 만들어 가는 청년공동체였다. 청년의 일터에서 일터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모인 청년들의 조합원 모임이었다. 기회를 잃고 차별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청년들의 삭막한 현실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뛰고 있는 청년들의 단체이었다. <청년유니온>은 집이 가난하더라도, 최저임금만 받아도, 여성 또는 성소수자여도, 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당신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라는 마음으로 청년들의 목소리를 꾸준히 외쳐 온 멋진 청년들의 조합이었다. 그네들은 주변의 작은 일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고 청년 한빛 문제도 자신들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맡아주었다. 35개 단체의 연대를 이끌어내 대책위를 꾸렸고 끝까지 함께 하며 희망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청년유니온>은 아들의 죽음에 넋이 나가있던 어른인 나를 어른스럽게 안아주었다. 한빛문제를 요란하지 않게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결해 나갔다. 아니 싸워나갔다.
2016년 10월 이후 우리 가족은 한빛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 한빛의 명예회복을 위해 회사와 만났다. 그러나 결과는 나의 순진한 착각을 깨는 일이었다. 진실이란 단어가 이렇게 초라하고 힘없는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나는 ‘괴물’을 보았다. 아, 이런 거구나. 이 거대한 골리앗을 어떻게 무너뜨린단 말인가? 너무나 막막했다. 한없이 작아진 벌레가 되어 가슴 한 가운데에는 뜨거운 불덩이를 얹혀놓은 채 매일 울고 울부짖었다. 세상일은 아니 역사는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 아니었나? 진리라는 게 존재하지 않나? 기가 막혔고 분노했다.
그때 만난 <청년유니온>. 광화문커피숍에서 <청년유니온>의 민수, 진희, 효원을 만났다. 잠시 휴가 나왔던 한솔이를 통해 한빛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남편이 그네들과 얘기하는 옆에서 나는 상식이나 진실로도 안 되는 일을 이 젊은이들이 뭘 어떻게 하겠다고? 별 기대를 갖지 않았다. 아니 냉소적이었다. 그네들이 어리다 보니 나보다 세상을 더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치적이어도 모자랄 판에, 00노총같은 거대한 조직력을 가진 노동조합도 아닌 이름도 낯선 <청년유니온>이 무엇을 하겠다고? 한솔이가 안쓰러우니까 인간적으로 관여하다가 금방 “안 되겠어요. 재벌회사와의 싸움이라 다른 큰 단체에 협조를 구해야 할 것 같아요.” 하며 상처만 주고 떠날 것 같았다. 솔직히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것이 뻔한 데 또한번 상처를 받기가 싫었다. 평소 수업중 학생들한테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미리 포기하지 마. 계란이 터진 만큼 바위는 그만큼 지저분해진 거야. 그렇게 계속 하다보면 진실은 언젠가는 승리해”하고 가르쳤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괴물앞에서 이미 패배주의자였다.
<청년유니온>은 그날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말하지 않았다. 단지 한빛 죽음의 문제가 남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청년들의 문제이니 앞으로의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싸우겠다고 했다. 단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긴 싸움에서 가족들이 함께 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니 가족들이 중심만 잡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첫모임 후 나는 대책위에 나가지 않았다. 한빛의 죽음을 내 스스로 인정하게 해서였다. 한빛이 정말 이 세상에 없나? 헷갈리고 있는데 대책위에서는 자꾸 한빛이 죽었다고 하니 너무 힘들었다. 한솔도 부대에 있어 가족이라고는 남편과 나밖에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족이 울면서 매달려도 될까 말까 한데 엄마인 나는 회피하고 있어 <청년유니온>에 정말 미안했다.
2017년 4월 18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한빛의 죽음을 공론화하기로 했다. 감히 꿈틀거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청년유니온> 덕분이다. 그런데 대책위 회의 참석 등 준비를 함께 했던 남편이 갑자기 쓰러져 내가 전면에 나서야 했다. 기자회견문도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앞이 캄캄했다. 남편은 중환자실에 있고 한솔은 부대에 있고 나는 대책위 회의 참석도 안 했는데 무얼 어떻게 하나? 겁이 났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세상에 한빛문제를 던져서 한빛 죽음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절실함과 성실하게 노력하는 청년들이 꿈과 희망을 갖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일터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한빛 죽음과 직면할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니 다 두려웠다.
그러나 <청년유니온>에서 가져온 한빛 관련 자료들을 보고 가슴이 울컥했다. 너무나 면밀하게 분석이 되어 있었다. 한빛 휴대폰과 회사 서류 등 부모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한빛관련 자료들이 왜 우리는 이 싸움을 해야 하는가 당위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자료가 나오기까지 <청년유니온>이 얼마나 집요하게 온 힘을 쏟았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못 자면서 이 일에 매달렸다는 것을 대화속에서 알았다.
나는 그네들앞에서 엉엉 울었다. 내가 하겠다고 했다. 나서겠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시는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고 괴물과의 싸움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바위가 온통 더러워질 때까지 계란을 던지고 또 던지겠다고 했다. <청년유니온>에게 한빛죽음은 남의 일인데 남의 일에 이렇게까지 애쓰는 게 충격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나는 밤을 새워 기자회견문을 썼다. 슬픔을 뒤로 미뤘다. 그리고 마음을 굳게 다지고 또다졌다.
기자간담회 후 기자회견, 촛불문화제 선언 집회, 노동절 연대 발언, 시민추모문화제, 좌담회 등 각종 대책위 활동이 계속 이어졌다. <청년유니온>은 이 모든 활동을 기획했고 함께 전력을 다해 싸워주었다. 거대한 벽 앞에서 번번이 좌절하고 대답 없는 외침이어도 그네들은 기운을 잃지 않고 오히려 나를 격려했다. 마치 집사처럼 항상 내 옆에서 모든 집회 활동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잘 전달하도록 도와준 진희는 남편의 입원으로 텅 빈 집에도 자주 와서 함께 자 주었고 용기를 주었다. 내가 지쳐있다는 말을 들으면 피곤할 텐데도 늦은 퇴근 후 찾아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슬쩍슬쩍 던지며 고난한 과정을 여유있게 살아갈 에너지를 주고 간 효원. 한솔이 선배라며 친근하게 다가와 말없이 든든한 울타리를 쳐 주어 따듯하게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나게 해 준 영민. 추모제 준비로 의정부 신곡2동성당과 신촌을 왔다 갔다 하느라 정신없었을 텐데도 항상 넉넉하고 용감했던 기원. 내가 순간순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할 때 일정이 급해도 끝까지 기다려주고 나를 너무 배려해 준 수호, 그리고 사무실에서 모든 일정을 챙기고 활동 때마다 몸으로 뛰어 준 병철. 그리고 민수. 민수야 위원장으로서 부담도 컸고 정말 힘들었지? 그런데 일이 꼬여도 우리가 상황파악을 못해 일을 틀어지게 만들어도 너는 한 번도 못마땅한 표정이나 힘든 표정을 짓지 않았지. 멀리 돌아가게 되었어도 항상 편안하게 우리를 지켜줬지. 그리고 또 <청년유니온>을 배우고 싶다고 잠시 상근하던 대안학교 학생 어진이도 자질구레하고 굳은 일을 도맡아주었다.
착한 청년들의 <청년유니온>. 그러나 그네들이 있었기에 그 많은 활동들을 만들어 냈고 많은 시민들과 청년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엄청 추웠던 상암동 추모제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대책위 활동을 기획했고 그때마다 많은 지지를 얻어내 큰 힘을 보태준 <청년유니온>. 그네들은 나의 갑작스런 감정변화나 패배주의적인 말에도 다소곳했고 일상적으로 받아주었다. 누가 어른인지 바뀌었던 거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던 각종 집회에 꼬박꼬박 참석해 한목소리를 내고 끝난 후에도 늦은 시간까지 남아 뒤처리까지 함께 마무리 해 준 <청년유니온> 조합원들. 친분관계도 없고 단지 <청년유니온> SNS를 통해 한빛소식을 들었음에도 적극적인 지지와 격려로 힘을 실어준 전국의 <청년유니온> 조합원들. 그래서 나에게 <청년유니온>은 특별하다.
또 <청년유니온>은 나에게 ‘연대’에 대해 큰 깨달음도 주었다. 남의 문제에 남의 어려움에 함께 해 준 <청년유니온>과 대책위를 보면서 ‘연대’가 있었기에 힘을 얻을 수 있었고 그 공감대 확대는 한빛 문제를 풀어가는 데 큰 지지대가 되었음을 확신한다.
<청년유니온> 정말 고맙습니다.
한빛이 머문 시간을 명예롭게 해 준 것. 잊지 않겠습니다. 그 감사함으로 한빛이 채울 내일을 채워나가겠습니다.
제가 다 갚.겠.습.니.다. 저는 한빛 엄마니까요.
- 엄마 김혜영
고맙습니다(1) - 청년유니온
그동안 내 슬픔에 젖어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는 게 아니라 더욱 진하게 기억되는 사람들...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떠올라 혼자서 ‘고맙습니다’ 하고 읊조린다. 버스 차창밖으로 보이는 무심한 표정의 사람들을 볼 때도 그네들이 떠올라 가슴이 뜨거워진다. 여기 저기 이곳 저곳 곳곳에 그네들이 있다. 바람이 휙 불듯 한빛이 가슴을 치고 가면 어김없이 그네들은 그림자처럼 따라와 나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한다. ‘그래 갚아야지. 나는 한빛엄마니까. 해야 할 일이 그래서 많은데 이렇게 징징대고만 있어서는 안 되지’ 하며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네들은 나를 다시 일으키고 일어서게 한다. 그 많은 고마운 사람들과 단체들. 다 기억하고 내가 죽는 날까지 잊지 않고 기도하고 싶은데 경황없던 때라서인가 생각이 다 안 난다. 절대로 잊으면 안 되니까 안간힘을 쓰며 하나하나 시간을 되돌려 더듬어 보지만 기억이 힘들다. 미안하다.
가장 긴박했던 순간, 가장 암울했던 시간을 깨며 다가왔던 <청년유니온>과 연대해 준 35개 단체의 대책위는 아직도 내 가슴속에 큰 바위로 든든하게 남아있다. 그네들은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시작부터 용기를 주며 손잡아 주었고 엄마인 나보다 한빛의 고민을 더 깊게 끌어내 알려주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노동조합이란 단어에는 익숙했지만 유니온은 낯설었기에 당연히 <청년유니온>이 존재하는지조차도 몰랐다. <청년유니온>은 노동조합을 가지지 못한 수많은 청년들에게 청년유니온이란 가능성을 전하며 새로운 노동을 만들어 가는 청년공동체였다. 청년의 일터에서 일터의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모인 청년들의 조합원 모임이었다. 기회를 잃고 차별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청년들의 삭막한 현실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뛰고 있는 청년들의 단체이었다. <청년유니온>은 집이 가난하더라도, 최저임금만 받아도, 여성 또는 성소수자여도, 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당신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라는 마음으로 청년들의 목소리를 꾸준히 외쳐 온 멋진 청년들의 조합이었다. 그네들은 주변의 작은 일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고 청년 한빛 문제도 자신들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맡아주었다. 35개 단체의 연대를 이끌어내 대책위를 꾸렸고 끝까지 함께 하며 희망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청년유니온>은 아들의 죽음에 넋이 나가있던 어른인 나를 어른스럽게 안아주었다. 한빛문제를 요란하지 않게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결해 나갔다. 아니 싸워나갔다.
2016년 10월 이후 우리 가족은 한빛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 한빛의 명예회복을 위해 회사와 만났다. 그러나 결과는 나의 순진한 착각을 깨는 일이었다. 진실이란 단어가 이렇게 초라하고 힘없는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나는 ‘괴물’을 보았다. 아, 이런 거구나. 이 거대한 골리앗을 어떻게 무너뜨린단 말인가? 너무나 막막했다. 한없이 작아진 벌레가 되어 가슴 한 가운데에는 뜨거운 불덩이를 얹혀놓은 채 매일 울고 울부짖었다. 세상일은 아니 역사는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 아니었나? 진리라는 게 존재하지 않나? 기가 막혔고 분노했다.
그때 만난 <청년유니온>. 광화문커피숍에서 <청년유니온>의 민수, 진희, 효원을 만났다. 잠시 휴가 나왔던 한솔이를 통해 한빛이야기를 듣고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남편이 그네들과 얘기하는 옆에서 나는 상식이나 진실로도 안 되는 일을 이 젊은이들이 뭘 어떻게 하겠다고? 별 기대를 갖지 않았다. 아니 냉소적이었다. 그네들이 어리다 보니 나보다 세상을 더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치적이어도 모자랄 판에, 00노총같은 거대한 조직력을 가진 노동조합도 아닌 이름도 낯선 <청년유니온>이 무엇을 하겠다고? 한솔이가 안쓰러우니까 인간적으로 관여하다가 금방 “안 되겠어요. 재벌회사와의 싸움이라 다른 큰 단체에 협조를 구해야 할 것 같아요.” 하며 상처만 주고 떠날 것 같았다. 솔직히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것이 뻔한 데 또한번 상처를 받기가 싫었다. 평소 수업중 학생들한테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미리 포기하지 마. 계란이 터진 만큼 바위는 그만큼 지저분해진 거야. 그렇게 계속 하다보면 진실은 언젠가는 승리해”하고 가르쳤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괴물앞에서 이미 패배주의자였다.
<청년유니온>은 그날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말하지 않았다. 단지 한빛 죽음의 문제가 남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청년들의 문제이니 앞으로의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싸우겠다고 했다. 단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긴 싸움에서 가족들이 함께 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끝까지 함께 할 것이니 가족들이 중심만 잡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첫모임 후 나는 대책위에 나가지 않았다. 한빛의 죽음을 내 스스로 인정하게 해서였다. 한빛이 정말 이 세상에 없나? 헷갈리고 있는데 대책위에서는 자꾸 한빛이 죽었다고 하니 너무 힘들었다. 한솔도 부대에 있어 가족이라고는 남편과 나밖에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족이 울면서 매달려도 될까 말까 한데 엄마인 나는 회피하고 있어 <청년유니온>에 정말 미안했다.
2017년 4월 18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한빛의 죽음을 공론화하기로 했다. 감히 꿈틀거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청년유니온> 덕분이다. 그런데 대책위 회의 참석 등 준비를 함께 했던 남편이 갑자기 쓰러져 내가 전면에 나서야 했다. 기자회견문도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앞이 캄캄했다. 남편은 중환자실에 있고 한솔은 부대에 있고 나는 대책위 회의 참석도 안 했는데 무얼 어떻게 하나? 겁이 났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세상에 한빛문제를 던져서 한빛 죽음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절실함과 성실하게 노력하는 청년들이 꿈과 희망을 갖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일터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한빛 죽음과 직면할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아무 것도 모르니 다 두려웠다.
그러나 <청년유니온>에서 가져온 한빛 관련 자료들을 보고 가슴이 울컥했다. 너무나 면밀하게 분석이 되어 있었다. 한빛 휴대폰과 회사 서류 등 부모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한빛관련 자료들이 왜 우리는 이 싸움을 해야 하는가 당위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자료가 나오기까지 <청년유니온>이 얼마나 집요하게 온 힘을 쏟았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못 자면서 이 일에 매달렸다는 것을 대화속에서 알았다.
나는 그네들앞에서 엉엉 울었다. 내가 하겠다고 했다. 나서겠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시는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고 괴물과의 싸움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바위가 온통 더러워질 때까지 계란을 던지고 또 던지겠다고 했다. <청년유니온>에게 한빛죽음은 남의 일인데 남의 일에 이렇게까지 애쓰는 게 충격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나는 밤을 새워 기자회견문을 썼다. 슬픔을 뒤로 미뤘다. 그리고 마음을 굳게 다지고 또다졌다.
기자간담회 후 기자회견, 촛불문화제 선언 집회, 노동절 연대 발언, 시민추모문화제, 좌담회 등 각종 대책위 활동이 계속 이어졌다. <청년유니온>은 이 모든 활동을 기획했고 함께 전력을 다해 싸워주었다. 거대한 벽 앞에서 번번이 좌절하고 대답 없는 외침이어도 그네들은 기운을 잃지 않고 오히려 나를 격려했다. 마치 집사처럼 항상 내 옆에서 모든 집회 활동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잘 전달하도록 도와준 진희는 남편의 입원으로 텅 빈 집에도 자주 와서 함께 자 주었고 용기를 주었다. 내가 지쳐있다는 말을 들으면 피곤할 텐데도 늦은 퇴근 후 찾아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슬쩍슬쩍 던지며 고난한 과정을 여유있게 살아갈 에너지를 주고 간 효원. 한솔이 선배라며 친근하게 다가와 말없이 든든한 울타리를 쳐 주어 따듯하게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나게 해 준 영민. 추모제 준비로 의정부 신곡2동성당과 신촌을 왔다 갔다 하느라 정신없었을 텐데도 항상 넉넉하고 용감했던 기원. 내가 순간순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할 때 일정이 급해도 끝까지 기다려주고 나를 너무 배려해 준 수호, 그리고 사무실에서 모든 일정을 챙기고 활동 때마다 몸으로 뛰어 준 병철. 그리고 민수. 민수야 위원장으로서 부담도 컸고 정말 힘들었지? 그런데 일이 꼬여도 우리가 상황파악을 못해 일을 틀어지게 만들어도 너는 한 번도 못마땅한 표정이나 힘든 표정을 짓지 않았지. 멀리 돌아가게 되었어도 항상 편안하게 우리를 지켜줬지. 그리고 또 <청년유니온>을 배우고 싶다고 잠시 상근하던 대안학교 학생 어진이도 자질구레하고 굳은 일을 도맡아주었다.
착한 청년들의 <청년유니온>. 그러나 그네들이 있었기에 그 많은 활동들을 만들어 냈고 많은 시민들과 청년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엄청 추웠던 상암동 추모제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대책위 활동을 기획했고 그때마다 많은 지지를 얻어내 큰 힘을 보태준 <청년유니온>. 그네들은 나의 갑작스런 감정변화나 패배주의적인 말에도 다소곳했고 일상적으로 받아주었다. 누가 어른인지 바뀌었던 거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던 각종 집회에 꼬박꼬박 참석해 한목소리를 내고 끝난 후에도 늦은 시간까지 남아 뒤처리까지 함께 마무리 해 준 <청년유니온> 조합원들. 친분관계도 없고 단지 <청년유니온> SNS를 통해 한빛소식을 들었음에도 적극적인 지지와 격려로 힘을 실어준 전국의 <청년유니온> 조합원들. 그래서 나에게 <청년유니온>은 특별하다.
또 <청년유니온>은 나에게 ‘연대’에 대해 큰 깨달음도 주었다. 남의 문제에 남의 어려움에 함께 해 준 <청년유니온>과 대책위를 보면서 ‘연대’가 있었기에 힘을 얻을 수 있었고 그 공감대 확대는 한빛 문제를 풀어가는 데 큰 지지대가 되었음을 확신한다.
<청년유니온> 정말 고맙습니다.
한빛이 머문 시간을 명예롭게 해 준 것. 잊지 않겠습니다. 그 감사함으로 한빛이 채울 내일을 채워나가겠습니다.
제가 다 갚.겠.습.니.다. 저는 한빛 엄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