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김혜영
아빠 (3)
남편은 <촛불시대, 혁신교육을 말하다>에서 자신이 전교조교사였고 해직교사였다는 것이 한빛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고 했다.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업보가 되어 멍에로 남을 것이라고 괴로워했다. ‘중학교시절부터 다양한 외적 조건(?)으로 인해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 대학이란 그러한 사회문제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대안들을 토론하고 세우고, 또 실천하기 위하여 현장으로 나가는 장소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한빛이 대학 1학년 때 00학회에 가입하며 쓴 글을 읽으며 나도 완전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한솔이도 대학교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어떤 인터뷰에서 그런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에 그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와 시민운동에 참여했는데 그 가정들이 다 무너졌어? 다들 어려움 속에서도 당당하게 잘 살고 있고 자녀들도 반듯하게 잘 자라고 있잖아. 하고 부인하고 또 부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역시 자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괴로웠다.
그냥 평범하게 술렁술렁 살았어야 했는데. 부부교사에게는 사실 많은 것이 확보될 수 있었다. 이른 퇴근 후 아이들과 영화나 연극을 보러갈 수 있었다. 긴 저녁시간에 부엌에서 아이들과 같이 저녁을 준비할 수도 있었다. 저녁을 먹으며 정치, 사회가 아닌 책이야기나 학교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다. 아님 아이들이 방과 후 피곤하니까 승용차로 학원을 데리고 다닐 수도 있었다. 그것뿐이랴? 다른 직장인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내는 긴 방학기간을 아이들과 가족해외여행을 다닐 수도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너무나 쉬운 일들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89년 8월 한빛이가 7개월 되었을 때 전교조교사로 해직되어 거리의 교사가 되었다. 그 후 전교조 본부에서 정책관련 일을 맡으며 급박한 정세변화에 대응하며 항상 긴장상태로 살았다. 물론 밤낮도 없었고 일요일도 휴일도 없었다. ‘전교조 합법화’와 ‘해직교사 원상복직’을 위해 연일 집회가 있었고 남편과 우리 가족은 모든 집회에 한 몫이 되어야 했다. 식사 때도 아까 낮에 참석해 체감했던 집회 분위기와 TV뉴스 내용이 정반대인 것에 분노하며 밥을 먹었다. 아침 9시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 빼고는 당시 하루의 생활은 일상적인 삶의 패턴에서 모두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해직교사들의 생활이 그랬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했다.
한빛이 한글을 조금씩 알아가던 서너 살쯤. 한겨레신문 1면에 ‘현직교사 과외적발’이란 표제어가 크게 실렸었다. 한빛이 그 글자를 읽으며 “엄마. 현직교사가 뭐여요? 해직교사랑 달라요?”하는 것이었다. 걸음마를 하기 전부터 집회를 따라다닌 한빛이가 숱하게 들은 단어는 ‘해직교사 원상복직’의 ‘해직교사’였다. 당연히 ‘해직교사’가 무슨 뜻인지 모른 채 단지 통단어로만 인식했으니 그런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봇물처럼 터지면서 명동성당 등 곳곳에서는 다양한 단체들의 집회가 매일 열렸다. 이때 집회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것에 대해 보수신문은 비판적이었다. 어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어린 아이들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칭얼거리는 아이를 끌어안고 있거나 지쳐서 잠들어 있는 아이를 업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거친 사진과 함께였다. 내가 봐도 어린 아이들이 불쌍했고 동정심을 갖게 했다. 그러나 나의 연민은 아이들이 아니었다. 사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이 안쓰러웠다. 남편과 함께 한 집회 경험이 있는 나에게 그들의 목소리는 너무 약해 보였고 그들의 투쟁이 당장 먹고 사는 생존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읽혀졌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칼럼니스트가 함부로 재단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전교조 집회는 주로 대학교에서 많이 열렸다. 교육민주화나 해직교사관련이라서 대학생제자들의 연대가 많아서였는지는 모르겠다. 대학교 안은 경찰들이 절대로 들어올 수 없고 최루탄도 안 쏜다고 들었지만 나는 데모라는 말이 여전히 무서웠다. 81년 지방국립사범대를 졸업해 교사가 되었지만 5.18도 잘 모르는 나였기에 집회참석은 엄청 부담되었다. 그러나 해직교사 원상복직 집회인 만큼 남편을 복직시키는 일에 전국의 교사들이 새벽부터 서울로 올라오는데 수도권에 사는 가족이 불참하면 안 되지 하며 기꺼이 참석했다. 그런데 문제는 한빛이었다. 즐거운 놀이터도 아닌데 한 살도 안 된 한빛을 데리고 각종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싫었다. 아무리 아빠 품에 있다지만 거리 행진을 위해 많이 걸어야 하고 밀고 밀리고 하는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한빛이 안쓰러웠다. 외가집에 맡기면 되지만 솔직히 불편한 일이다. 전교조 집회관련 저녁 뉴스가 있으면 곧바로 전화해 혹시 데모에 나갔냐? 하고 걱정하시며 확인하시는 친정부모님께 한빛을 맡길 수는 없었다. 결국 한빛을, 어린 아이를 데리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1990년 5월. 경희대 노천극장에서 전교조 출범 1주년 집회가 있었다. 교사들이 기획해서인가 5월의 축제마당 같았다. 맑은 하늘위로는 오색 풍선이 날고 전국의 교사가 즐겁게 한마음으로 노래하며 행복해했다. 그때 다다다닥 하며 최루탄이 터졌다. 학교 안까지 경찰이 들어왔다. 대학생들이 화염병 투척으로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축제의 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몇 몇 교사들과 대학생들의 안내를 받으며 뒷산으로 뛰었다. 남편은 진행본부에 있어 나혼자 한빛을 안고 뛰었다. 눈이 따가왔다. 한빛도 매운 최루탄에 재채기를 하고 험악해진 분위기에 울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일을 처음 겪었다. 최루탄 연기가 이렇게 따갑고 매서운지도 처음 알았다. 나는 엉엉 울면서 한빛을 꼬옥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최루탄 냄새를 못 맡게 하려고 한빛을 내 웃옷 속에 숨겼다. 한빛한테 ‘미안해. 다시는 안 데리고 올게. 미안해’하고 말하며 최대한 빨리 허둥지둥 행렬을 따라갔다. 정말 미안했다. 한빛한테는 내 자식한테는 이런 경험을 하게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내니까 어른이니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어린 자식한테까지는 싫었다.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범벅이 된 눈물을 훔치며 가시철망 울타리를 넘는데 자꾸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빨리 안전한 곳으로 나가야 한다는 조급함에 쓰고 있던 안경을 내던졌다. 아, 이 안경, 아직 카드대금도 지불이 안 된 건데 하면서도 두 팔로는 한빛을 꼬옥 껴안아야 했고 최루탄으로 따가워진 눈물을 훔칠 손이 없었기에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안경을 버렸다.
정신없이 나와 보니 주택가였다. 외대 근처라고 했다. 한빛을 숨겼던 내 옷을 벗고 어느 집 대문 앞에 다리를 뻗고 앉아 엉엉 울었다. 긴 골목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대문을 깔끔하게 닫고 집안에서 TV를 보면서 5월의 휴일 낮을 즐기고 있을 골목의 집들이 딴 세상 같았다. 최루탄 때문인지 이런 상황이 억울해서인지 터진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내가 너무나 서럽게 우는 게 이상했는지 한빛이 울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엄마 울지마” 하면서 내 품으로 들어왔다. 한빛에게 물 한모금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집들은 굳게 닫혀 있었고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빛에게 정말 미안했다.
그러나 남편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같은 교사로서 나도 함께 해야 할 일을 남편이 대신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희생이 있어 교육현장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교조 합법화투쟁 중에도 남편은 가족에 대한 부채감 때문인지 틈만 나면 집안일을 했고 아이들에게도 극진했다. ‘동지’나 ‘투쟁’ 같은 단어도 무서워 할 만큼 그 세계를 몰랐던 나였기에 나는 남편에게 ‘동지’가 될 수 없었다. 전교조 본부의 정책일을 하면서 ‘아내’도 설득하고 ‘아내’의 눈치까지 살펴야 했으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을 그 때. 남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해직교사들의 삶이라며 남편은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 때 그네들이 ‘동료교사’가 아닌 ‘동지’로 서로에게 힘을 주지 않았다면 남편도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내지 못 했을 것이다.
남편은 열심히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교사임을 자랑스러워 했고 자신의 전공인 교육사회학에 자부심을 가졌다. 아이들의 행복한 미래교육을 위해 고민했고 실천하고자 했다. 한빛은 아빠의 이런 면을 모른 채 떠났다. 아빠가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한빛과 나누었더라면 아빠의 통증은 지금보다는 덜 아플 것이다. 아들 자랑만 하지 말고 자기 자랑질이라도 하지 왜 미뤘을까. 나처럼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엄마 아빠의 사랑을 넘치게 받았다고 고백하고 떠난 한빛은 분명 아빠를 자랑스러워했고 좋아했으리라 확신한다. 한빛아 지금이라도 아빠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겠지?
- 엄마 김혜영
아빠 (3)
남편은 <촛불시대, 혁신교육을 말하다>에서 자신이 전교조교사였고 해직교사였다는 것이 한빛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고 했다.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업보가 되어 멍에로 남을 것이라고 괴로워했다. ‘중학교시절부터 다양한 외적 조건(?)으로 인해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나에게 대학이란 그러한 사회문제에 대한 수많은 이론과 대안들을 토론하고 세우고, 또 실천하기 위하여 현장으로 나가는 장소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한빛이 대학 1학년 때 00학회에 가입하며 쓴 글을 읽으며 나도 완전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한솔이도 대학교 총학생회장을 하면서 어떤 인터뷰에서 그런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에 그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와 시민운동에 참여했는데 그 가정들이 다 무너졌어? 다들 어려움 속에서도 당당하게 잘 살고 있고 자녀들도 반듯하게 잘 자라고 있잖아. 하고 부인하고 또 부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역시 자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괴로웠다.
그냥 평범하게 술렁술렁 살았어야 했는데. 부부교사에게는 사실 많은 것이 확보될 수 있었다. 이른 퇴근 후 아이들과 영화나 연극을 보러갈 수 있었다. 긴 저녁시간에 부엌에서 아이들과 같이 저녁을 준비할 수도 있었다. 저녁을 먹으며 정치, 사회가 아닌 책이야기나 학교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다. 아님 아이들이 방과 후 피곤하니까 승용차로 학원을 데리고 다닐 수도 있었다. 그것뿐이랴? 다른 직장인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내는 긴 방학기간을 아이들과 가족해외여행을 다닐 수도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너무나 쉬운 일들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89년 8월 한빛이가 7개월 되었을 때 전교조교사로 해직되어 거리의 교사가 되었다. 그 후 전교조 본부에서 정책관련 일을 맡으며 급박한 정세변화에 대응하며 항상 긴장상태로 살았다. 물론 밤낮도 없었고 일요일도 휴일도 없었다. ‘전교조 합법화’와 ‘해직교사 원상복직’을 위해 연일 집회가 있었고 남편과 우리 가족은 모든 집회에 한 몫이 되어야 했다. 식사 때도 아까 낮에 참석해 체감했던 집회 분위기와 TV뉴스 내용이 정반대인 것에 분노하며 밥을 먹었다. 아침 9시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 빼고는 당시 하루의 생활은 일상적인 삶의 패턴에서 모두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해직교사들의 생활이 그랬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했다.
한빛이 한글을 조금씩 알아가던 서너 살쯤. 한겨레신문 1면에 ‘현직교사 과외적발’이란 표제어가 크게 실렸었다. 한빛이 그 글자를 읽으며 “엄마. 현직교사가 뭐여요? 해직교사랑 달라요?”하는 것이었다. 걸음마를 하기 전부터 집회를 따라다닌 한빛이가 숱하게 들은 단어는 ‘해직교사 원상복직’의 ‘해직교사’였다. 당연히 ‘해직교사’가 무슨 뜻인지 모른 채 단지 통단어로만 인식했으니 그런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봇물처럼 터지면서 명동성당 등 곳곳에서는 다양한 단체들의 집회가 매일 열렸다. 이때 집회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것에 대해 보수신문은 비판적이었다. 어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어린 아이들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칭얼거리는 아이를 끌어안고 있거나 지쳐서 잠들어 있는 아이를 업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거친 사진과 함께였다. 내가 봐도 어린 아이들이 불쌍했고 동정심을 갖게 했다. 그러나 나의 연민은 아이들이 아니었다. 사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이 안쓰러웠다. 남편과 함께 한 집회 경험이 있는 나에게 그들의 목소리는 너무 약해 보였고 그들의 투쟁이 당장 먹고 사는 생존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읽혀졌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칼럼니스트가 함부로 재단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전교조 집회는 주로 대학교에서 많이 열렸다. 교육민주화나 해직교사관련이라서 대학생제자들의 연대가 많아서였는지는 모르겠다. 대학교 안은 경찰들이 절대로 들어올 수 없고 최루탄도 안 쏜다고 들었지만 나는 데모라는 말이 여전히 무서웠다. 81년 지방국립사범대를 졸업해 교사가 되었지만 5.18도 잘 모르는 나였기에 집회참석은 엄청 부담되었다. 그러나 해직교사 원상복직 집회인 만큼 남편을 복직시키는 일에 전국의 교사들이 새벽부터 서울로 올라오는데 수도권에 사는 가족이 불참하면 안 되지 하며 기꺼이 참석했다. 그런데 문제는 한빛이었다. 즐거운 놀이터도 아닌데 한 살도 안 된 한빛을 데리고 각종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싫었다. 아무리 아빠 품에 있다지만 거리 행진을 위해 많이 걸어야 하고 밀고 밀리고 하는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한빛이 안쓰러웠다. 외가집에 맡기면 되지만 솔직히 불편한 일이다. 전교조 집회관련 저녁 뉴스가 있으면 곧바로 전화해 혹시 데모에 나갔냐? 하고 걱정하시며 확인하시는 친정부모님께 한빛을 맡길 수는 없었다. 결국 한빛을, 어린 아이를 데리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1990년 5월. 경희대 노천극장에서 전교조 출범 1주년 집회가 있었다. 교사들이 기획해서인가 5월의 축제마당 같았다. 맑은 하늘위로는 오색 풍선이 날고 전국의 교사가 즐겁게 한마음으로 노래하며 행복해했다. 그때 다다다닥 하며 최루탄이 터졌다. 학교 안까지 경찰이 들어왔다. 대학생들이 화염병 투척으로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축제의 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몇 몇 교사들과 대학생들의 안내를 받으며 뒷산으로 뛰었다. 남편은 진행본부에 있어 나혼자 한빛을 안고 뛰었다. 눈이 따가왔다. 한빛도 매운 최루탄에 재채기를 하고 험악해진 분위기에 울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일을 처음 겪었다. 최루탄 연기가 이렇게 따갑고 매서운지도 처음 알았다. 나는 엉엉 울면서 한빛을 꼬옥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최루탄 냄새를 못 맡게 하려고 한빛을 내 웃옷 속에 숨겼다. 한빛한테 ‘미안해. 다시는 안 데리고 올게. 미안해’하고 말하며 최대한 빨리 허둥지둥 행렬을 따라갔다. 정말 미안했다. 한빛한테는 내 자식한테는 이런 경험을 하게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내니까 어른이니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어린 자식한테까지는 싫었다.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범벅이 된 눈물을 훔치며 가시철망 울타리를 넘는데 자꾸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빨리 안전한 곳으로 나가야 한다는 조급함에 쓰고 있던 안경을 내던졌다. 아, 이 안경, 아직 카드대금도 지불이 안 된 건데 하면서도 두 팔로는 한빛을 꼬옥 껴안아야 했고 최루탄으로 따가워진 눈물을 훔칠 손이 없었기에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안경을 버렸다.
정신없이 나와 보니 주택가였다. 외대 근처라고 했다. 한빛을 숨겼던 내 옷을 벗고 어느 집 대문 앞에 다리를 뻗고 앉아 엉엉 울었다. 긴 골목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대문을 깔끔하게 닫고 집안에서 TV를 보면서 5월의 휴일 낮을 즐기고 있을 골목의 집들이 딴 세상 같았다. 최루탄 때문인지 이런 상황이 억울해서인지 터진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내가 너무나 서럽게 우는 게 이상했는지 한빛이 울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엄마 울지마” 하면서 내 품으로 들어왔다. 한빛에게 물 한모금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집들은 굳게 닫혀 있었고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빛에게 정말 미안했다.
그러나 남편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같은 교사로서 나도 함께 해야 할 일을 남편이 대신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희생이 있어 교육현장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교조 합법화투쟁 중에도 남편은 가족에 대한 부채감 때문인지 틈만 나면 집안일을 했고 아이들에게도 극진했다. ‘동지’나 ‘투쟁’ 같은 단어도 무서워 할 만큼 그 세계를 몰랐던 나였기에 나는 남편에게 ‘동지’가 될 수 없었다. 전교조 본부의 정책일을 하면서 ‘아내’도 설득하고 ‘아내’의 눈치까지 살펴야 했으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을 그 때. 남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나 대부분의 해직교사들의 삶이라며 남편은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 때 그네들이 ‘동료교사’가 아닌 ‘동지’로 서로에게 힘을 주지 않았다면 남편도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내지 못 했을 것이다.
남편은 열심히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교사임을 자랑스러워 했고 자신의 전공인 교육사회학에 자부심을 가졌다. 아이들의 행복한 미래교육을 위해 고민했고 실천하고자 했다. 한빛은 아빠의 이런 면을 모른 채 떠났다. 아빠가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한빛과 나누었더라면 아빠의 통증은 지금보다는 덜 아플 것이다. 아들 자랑만 하지 말고 자기 자랑질이라도 하지 왜 미뤘을까. 나처럼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엄마 아빠의 사랑을 넘치게 받았다고 고백하고 떠난 한빛은 분명 아빠를 자랑스러워했고 좋아했으리라 확신한다. 한빛아 지금이라도 아빠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