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김혜영
아름다운 청년(1) - 후원금
2016년 2월. 한빛이 “엄마 아빠 감사합니다.” 하며 봉투를 두 개 내밀었다. 첫 월급을 탔다고 했다. 얼떨결에 봉투를 받았는데 꽤 두툼했다. “왜 이렇게 많아? 이제 너도 독립해야 하잖아. 앞으로는 엄마가 생활비 안 줄 건데?” 하니 자기 생활비는 남겼다며 첫 월급이라서 엄마 아빠께 반반씩 선물하는 거라고 했다.
2월에 국립사범대를 졸업하고 3월에 곧바로 학교로 나가 첫 월급을 탔던 나는 요즘의 회사 씨스템이 참 낯설다. 하긴 정규직 비정규직이란 단어가 익숙해진 것도 얼마 안 된다. 회사에 들어가려면 공채라는 이름아래 서류심사, 필기시험이 있고 면접도 다양한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고 합격이 되도 인턴과정이란 게 있었다. 그럼 이제 끝난 거야? 하니 인턴 과정도 최종 합격 발표가 있기까지는 긴장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볼 때는 긴장이 아니라 끝없는 경쟁과정인 것 같았다. 요즘 젊은이들의 삶이 많이 가엾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도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쳐 사회에 나간다는 게 안쓰러웠다. 내가 세상을 너무 무난하고 편하게 살아왔나?
나는 솔직히 한빛의 인턴월급이 얼마이고 정규직원이 되면 얼마나 더 많이 받고 월급날은 언제인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가 아직 경제력이 있어 그렇기도 했겠지만 아들 월급을 엄마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아들이 월급을 탄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이고 이제 아들도 내 곁을 떠나겠구나하는 서글픔을 느꼈다. 그리고 힘들게 번 돈을 이렇게 개념없이 막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엄마 아빠한테 주느니 결혼자금을 위해 빨리 적금을 들라고 했다. “엄마 아빠는 너 결혼할 때 집 못 사준다. 그만한 돈도 없지만 설령 있어도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 대학까지 키워주었으니까. 그리고 결혼도 너가 모은 것으로 해야 한다. 그러려면 한 달이라도 빨리 적금을 들어야 해. 그러니까 다음 달부터는 엄마 아빠한테 용돈 줄 생각 말고 꼭 적금 들어야 해” 하고 잔소리를 했다. 속으로는 아들이 준 두툼한 봉투에 감격하는 나자신한테 ‘아휴, 이 속물’ 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엄마 아빠가 이만큼 키워주셨는데...” 하길래 못 이기는 척 살짝 욕심을 냈다. “너가 잘 자라서 엄마를 자랑스럽게 하고 있다는 확인을 받고 싶은데 매달 10만원 줄 수 있니? 그럼 엄마 아빠가 아주 행복하고 기쁘게 잘 쓸게” 하고 쑥스럽게 말하니 한빛은 당연하지요. 하며 웃었다. 그러나 나는 한빛의 첫 월급과 매달 받을 10만원을 절대로 쓰지 못 할 거라는 것을 안다. 아들이 어렵고 힘들게 번 돈을 어떻게 쓸 수 있으랴? 다음 날 통장을 개설해 한빛한테 받은 첫 월급을 고스란히 넣었다. 통장 표지에 ‘♡사랑하는 한빛꺼’라고 써서. 꼬박꼬박 모으면 한빛 결혼할 때 목돈이 되겠지? 가슴이 설렜다.
그런데 다음 달, 그 다음 달, 몇 달이 지나도 적금을 안 든 것 같았다. 물어보면 깜빡했다며 다음 달부터 꼭 할 거라고 했다. 여름이 되었을 때 무심코 적금통장 좀 보여주지 하며 서운한 듯 말하니 그때서야 “엄마, 사실은 저 돈 벌면 꼭 하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하면서 그동안 월급을 세월호 4.16연대, 대학때 처음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한 기륭전자, KTX해고승무원, 빈민사회연대 등에 후원금으로 냈다고 했다. 그들에게 항상 미안했고 빚을 지고 있어서라고 했다. “12월까지만 내고 내년부터 적금 들려고 했어요. 엄마 12월까지만 기다려 주실래요?” 하는 것이었다.
한빛의 생각은 아름답지만 사회에 나와서까지 현실적이지 못한 게 걱정이 되었다.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생각이 올바르고 그것을 실천하는 한빛이 기특했기에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격려했다. 그래도 속마음까지는 감출 수 없어서 한 마디 했다. ‘결혼해서도 그렇게 월급을 전액 후원하면 안 된다. 후원금은 여유가 있거나 생활비를 고려해서 배분해야 한다. 또 후원금을 내더라고 아내한테는 가급적 비밀로 해야 한다. 엄마는 아들을 이해해도 남편을 이해하는 아내는 없다’하고 간곡하게 말했다. 아들이 걱정되긴 했지만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컸다니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나는 한빛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나도 돈에 연연한다. 인생 길지도 않은데 지나치게 아끼고 절약한다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몇 해 전 겨울. 덕수궁 앞을 지나는데 쌍용자동차였을까 대한문 앞 농성장에서는 저녁미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몹시 추운 저녁이었는데 어둠속으로 하얀 사제복을 입으신 신부님들과 찬 바닥에 뜨문뜨문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무심했던 것도 미안하고 나라도 한 명 더 힘을 실어주어야 할 것 같아 같이 찬 바닥에 앉았다. 으... 엉덩이의 냉기와 칼바람에 온 몸이 동태가 되고 있었다. 추위에 약한 나는 점점 얼어가는 내 몸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미사참례는 저리 가라였다. 이러면서까지 앉아 있어야 하나 하며 계속 갈등을 하다가 살고 싶어서 슬쩍 일어났다. 저 사람들은 장기간 노숙을 하면서 단식까지 하는데 미사시간 한 시간도 견디어 내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가방에는 아까 은행에서 찾은 생활비가 있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은행봉투째 봉헌함에 넣었다. ‘죄송합니다. 돈으로 때워서. 저 정말 너무 추워서 죽을 것 같아요. 힘 내세요’ 하고 되뇌이며 얼른 전철을 탔다. 전철안온기에 얼었던 몸이 사글사글 녹기 시작했다. 너무 행복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확 솟았다.
마음의 빚이 그렇게 컸나? 한빛은 마지막 남긴 글에서도 자신의 통장에 남은 돈은 엄마 아빠가 잘 아실 테니 힘든 곳에 보내달라고 했다. 그쪽에서 일하고 있는 대학 친구들에게도 보내달라고 했다. 우리가 뭘 안다고? 한빛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나는 한빛이 생각하는 그런 엄마가 아니었다. 한빛통장을 정리하면서 한빛 아빠는 엉엉 울었다. 통장에 찍힌 한 줄 한 줄이 한빛의 아름다운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한빛은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한빛이 페이스북에 게시했던 글을 읽으며 또 울었다. (2016.1.9.) <어제 두 곳에 후원금을 보냈다. 자랑거리는 아니니 조용히 처리(?)하려 했는데, 생각해보니 다른 이도 참여토록 후원의 의미를 밝힌 글을 올리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 용돈이 아닌 생계의 목적으로 행한 노동의 대가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시작이 중요하다. 첫 월급이라, 모아놓은 게 없어서, 돈 갚아야 하니까, 집 살 예정인데, 등등 단서조항 붙이면 영원히 미루게 된다. ...... 몇 %를 낼까 뭐 그런 계산을 하곤 했다. 막상 월급을 받으니 얼마되지도 않는데 10~20%를 누구 코에 붙일까 싶어 절반을 확 질렀다. 나중에 후회하겠지만 아직은 기분이 좋다.>
그러나 한빛은 새해에는 꼭 적금을 들겠다던 엄마와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 엄마 김혜영
아름다운 청년(1) - 후원금
2016년 2월. 한빛이 “엄마 아빠 감사합니다.” 하며 봉투를 두 개 내밀었다. 첫 월급을 탔다고 했다. 얼떨결에 봉투를 받았는데 꽤 두툼했다. “왜 이렇게 많아? 이제 너도 독립해야 하잖아. 앞으로는 엄마가 생활비 안 줄 건데?” 하니 자기 생활비는 남겼다며 첫 월급이라서 엄마 아빠께 반반씩 선물하는 거라고 했다.
2월에 국립사범대를 졸업하고 3월에 곧바로 학교로 나가 첫 월급을 탔던 나는 요즘의 회사 씨스템이 참 낯설다. 하긴 정규직 비정규직이란 단어가 익숙해진 것도 얼마 안 된다. 회사에 들어가려면 공채라는 이름아래 서류심사, 필기시험이 있고 면접도 다양한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고 합격이 되도 인턴과정이란 게 있었다. 그럼 이제 끝난 거야? 하니 인턴 과정도 최종 합격 발표가 있기까지는 긴장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볼 때는 긴장이 아니라 끝없는 경쟁과정인 것 같았다. 요즘 젊은이들의 삶이 많이 가엾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도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쳐 사회에 나간다는 게 안쓰러웠다. 내가 세상을 너무 무난하고 편하게 살아왔나?
나는 솔직히 한빛의 인턴월급이 얼마이고 정규직원이 되면 얼마나 더 많이 받고 월급날은 언제인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가 아직 경제력이 있어 그렇기도 했겠지만 아들 월급을 엄마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아들이 월급을 탄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이고 이제 아들도 내 곁을 떠나겠구나하는 서글픔을 느꼈다. 그리고 힘들게 번 돈을 이렇게 개념없이 막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엄마 아빠한테 주느니 결혼자금을 위해 빨리 적금을 들라고 했다. “엄마 아빠는 너 결혼할 때 집 못 사준다. 그만한 돈도 없지만 설령 있어도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 대학까지 키워주었으니까. 그리고 결혼도 너가 모은 것으로 해야 한다. 그러려면 한 달이라도 빨리 적금을 들어야 해. 그러니까 다음 달부터는 엄마 아빠한테 용돈 줄 생각 말고 꼭 적금 들어야 해” 하고 잔소리를 했다. 속으로는 아들이 준 두툼한 봉투에 감격하는 나자신한테 ‘아휴, 이 속물’ 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엄마 아빠가 이만큼 키워주셨는데...” 하길래 못 이기는 척 살짝 욕심을 냈다. “너가 잘 자라서 엄마를 자랑스럽게 하고 있다는 확인을 받고 싶은데 매달 10만원 줄 수 있니? 그럼 엄마 아빠가 아주 행복하고 기쁘게 잘 쓸게” 하고 쑥스럽게 말하니 한빛은 당연하지요. 하며 웃었다. 그러나 나는 한빛의 첫 월급과 매달 받을 10만원을 절대로 쓰지 못 할 거라는 것을 안다. 아들이 어렵고 힘들게 번 돈을 어떻게 쓸 수 있으랴? 다음 날 통장을 개설해 한빛한테 받은 첫 월급을 고스란히 넣었다. 통장 표지에 ‘♡사랑하는 한빛꺼’라고 써서. 꼬박꼬박 모으면 한빛 결혼할 때 목돈이 되겠지? 가슴이 설렜다.
그런데 다음 달, 그 다음 달, 몇 달이 지나도 적금을 안 든 것 같았다. 물어보면 깜빡했다며 다음 달부터 꼭 할 거라고 했다. 여름이 되었을 때 무심코 적금통장 좀 보여주지 하며 서운한 듯 말하니 그때서야 “엄마, 사실은 저 돈 벌면 꼭 하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하면서 그동안 월급을 세월호 4.16연대, 대학때 처음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한 기륭전자, KTX해고승무원, 빈민사회연대 등에 후원금으로 냈다고 했다. 그들에게 항상 미안했고 빚을 지고 있어서라고 했다. “12월까지만 내고 내년부터 적금 들려고 했어요. 엄마 12월까지만 기다려 주실래요?” 하는 것이었다.
한빛의 생각은 아름답지만 사회에 나와서까지 현실적이지 못한 게 걱정이 되었다.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생각이 올바르고 그것을 실천하는 한빛이 기특했기에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격려했다. 그래도 속마음까지는 감출 수 없어서 한 마디 했다. ‘결혼해서도 그렇게 월급을 전액 후원하면 안 된다. 후원금은 여유가 있거나 생활비를 고려해서 배분해야 한다. 또 후원금을 내더라고 아내한테는 가급적 비밀로 해야 한다. 엄마는 아들을 이해해도 남편을 이해하는 아내는 없다’하고 간곡하게 말했다. 아들이 걱정되긴 했지만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컸다니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나는 한빛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나도 돈에 연연한다. 인생 길지도 않은데 지나치게 아끼고 절약한다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몇 해 전 겨울. 덕수궁 앞을 지나는데 쌍용자동차였을까 대한문 앞 농성장에서는 저녁미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몹시 추운 저녁이었는데 어둠속으로 하얀 사제복을 입으신 신부님들과 찬 바닥에 뜨문뜨문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무심했던 것도 미안하고 나라도 한 명 더 힘을 실어주어야 할 것 같아 같이 찬 바닥에 앉았다. 으... 엉덩이의 냉기와 칼바람에 온 몸이 동태가 되고 있었다. 추위에 약한 나는 점점 얼어가는 내 몸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미사참례는 저리 가라였다. 이러면서까지 앉아 있어야 하나 하며 계속 갈등을 하다가 살고 싶어서 슬쩍 일어났다. 저 사람들은 장기간 노숙을 하면서 단식까지 하는데 미사시간 한 시간도 견디어 내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가방에는 아까 은행에서 찾은 생활비가 있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은행봉투째 봉헌함에 넣었다. ‘죄송합니다. 돈으로 때워서. 저 정말 너무 추워서 죽을 것 같아요. 힘 내세요’ 하고 되뇌이며 얼른 전철을 탔다. 전철안온기에 얼었던 몸이 사글사글 녹기 시작했다. 너무 행복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확 솟았다.
마음의 빚이 그렇게 컸나? 한빛은 마지막 남긴 글에서도 자신의 통장에 남은 돈은 엄마 아빠가 잘 아실 테니 힘든 곳에 보내달라고 했다. 그쪽에서 일하고 있는 대학 친구들에게도 보내달라고 했다. 우리가 뭘 안다고? 한빛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나는 한빛이 생각하는 그런 엄마가 아니었다. 한빛통장을 정리하면서 한빛 아빠는 엉엉 울었다. 통장에 찍힌 한 줄 한 줄이 한빛의 아름다운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한빛은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한빛이 페이스북에 게시했던 글을 읽으며 또 울었다. (2016.1.9.) <어제 두 곳에 후원금을 보냈다. 자랑거리는 아니니 조용히 처리(?)하려 했는데, 생각해보니 다른 이도 참여토록 후원의 의미를 밝힌 글을 올리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 용돈이 아닌 생계의 목적으로 행한 노동의 대가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시작이 중요하다. 첫 월급이라, 모아놓은 게 없어서, 돈 갚아야 하니까, 집 살 예정인데, 등등 단서조항 붙이면 영원히 미루게 된다. ...... 몇 %를 낼까 뭐 그런 계산을 하곤 했다. 막상 월급을 받으니 얼마되지도 않는데 10~20%를 누구 코에 붙일까 싶어 절반을 확 질렀다. 나중에 후회하겠지만 아직은 기분이 좋다.>
그러나 한빛은 새해에는 꼭 적금을 들겠다던 엄마와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