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김혜영
고맙습니다(3) - 기적의 선물
기자간담회 후 <故이한빛PD 상암동 추모문화제 -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습니다.(2017.4.28)>가 열렸던 날은 4월의 봄날씨가 무색하리만치 엄청 추웠다. 나는 장호원에서 2박3일 연수가 있었기 때문에 진행상황을 알 수 없었고 추모제에 늦지 않게 오라는 연락만 받았다. 가족이 제일 앞장 서서 나서야 하는데 아무 일도 도와주지도 못해 미안했다. 아들의 죽음에 엄마가 밤낮으로 뛰어도 모자랄 판에 매번 다 차려놓은 밥상에 몸만 가서 앉는 것 같았다. 다행히도 집회시작 직전에 상암동에 도착했다. 세 번째 온 상암동. 여전히 낯설었다. 밤에 온 것은 처음이었는데 높은 빌딩들에서 불빛들이 눈이 아프게 쏟아지고 있었다. 너도 나도 내뿜고 있는 하얀 불빛들이 몸서리칠만큼 싫었다. 모든 불빛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 같았다. 빌딩 숲속으로 들어가는 내 모습이 마치 중학교 남학생들이 둥글게 원을 만들어 가운데 앉아있는 술래를 향해 강하게 공을 내리꽂는 놀이 같았다. 피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저 공이 빗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는 술래가 나란 생각이 들었다. 온 몸이 아팠다. 슬펐다.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그까짓 집회한다고 꿈쩍이라도 할 것 같으냐? 순진하기는 쯧쯧쯧...하며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자꾸 나락으로 떨어지는 감정을 감추고 추모문화제를 기획하고 준비해온 청년유니온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청년유니온 모두가 다 나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CJ E&M앞에는 400개가 넘는 흰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 있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처음에는 의자를 200개 정도 준비했다가 추모인원이 자꾸 늘어나 200여개를 급히 보충했다고 했다.
앞자리에 앉아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데 플라스틱 의자에서 찬 기운이 올라오면서 몸이 덜덜 떨렸다. 흘러내리던 눈물도 뺨에 얼어붙어 얼굴도 얼기 시작했다. 한빛엄마인 나도 이렇게 추워서 뛰쳐 나가고 싶은데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여기 와서 이 추위에 떨고 있는가? 남의 일에. ‘사람’이란 표현을 썼지만 왠지 어색하다. 아니 미안하다. ‘시민?’ ‘청년?’이란 단어가 ‘사람’이란 말보다 더 존경스러운 말이라면 혹시 그 이상의 아름다운 단어가 있다면 그들에게 그 단어를 봉헌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앞에 나가 발언할 때 보니 많은 사람들이 서서 함께 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이들에게 보답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그래 끝까지 싸우는 거다. 한빛과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함께 하는데 나는 엄마 아닌가? 한빛에게 갚을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끝까지 쓰러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날 그 매서운 추위를 뛰어넘게 한 사람이 또 있었다. 언어의 온도란 말을 이럴 때 쓰고 싶다. 아님 말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추위를 녹일 만한 열기로 추모객들을 북돋아주었고 나에게도 기죽지 말라고 용기를 준 것은 다산인권센타의 랄라였다. 추모문화제 사회를 맡았던 랄라님의 당찬 목소리가 내 온몸을, 집회현장을 뜨겁게 했다. 랄라는 한빛이 삶을 포기하면서 남긴 메시지를 진정성과 간절함을 담아 외쳤다. 남아있는 우리가 해야 할 책임에 대해 외쳤다.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습니다.’ ‘원래 그런 것은 없습니다’ 등의 구호를 외칠 때마다 나도 눈물이 범벅이 된 채 악을 쓰며 따라 외쳤다. 그래 내 몫이다. 이제는 앞만 보고 가자.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기자간담회때(2017.4.18)도 랄라는 사회를 보았다. 나는 랄라의 본명이 무엇인지 왜 랄라인지 다산인권센타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 랄라가 일하는 다산인권센타가 35개 대책위의 하나임을 나중에 들었다. 랄라는 기자간담회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빛의 죽음을 공론화하는 이유를 군더더기 없이 명확하게 제시했다. 정말 또렷했고 깔끔했다. 랄라의 발언을 들으며 개인적 슬픔과 분노에 젖어 있던 나는 한빛을 살려야 하고 싸워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후 만났을 때 고맙다는 인사를 했지만 랄라는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랄라같은 사람들과 ‘함께’가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서로를 격려하는지를 보여준 35개 대책위원회 단체들. 추모문화제에 와서 힘을 실어준 많은 사람들. 이들이 있기에 약자들도 숨을 쉴 수 있고 이 사회는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살아가면서 변호사 만날 일이 생전 있을까 했다. 한빛 죽음 후 공론화하기까지 6개월간 진상규명을 위해 개인적으로 함께 해주신 민변의 B변호사님. 참담한 절망 속에 빠져있는 우리 가족에게 지극히 인간적으로 다가오셔서 위로하며 도와주셨다. 대형로펌의 변호사와 TV드라마의 권력을 따라 다니는 변호사만 있는 줄 알았던 촌스런 나에게 B변호사님은 변호사가 아닌 변호인이었다. 당연한 거지만 변호사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또 그 생각과 실천의지가 변호사와 의뢰인과의 관계도 넘어설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B변호사를 보면서 소외자, 서러운 이, 억울한 이가 찾아갈 곳이 이 세상에 있음에 안도했다. 집회 현장에서 만나면 항상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너무 일상적이셔서 그냥 스쳐 지나가다가 ‘아, B변호사님이시지’ 하고 다시 돌아서서 인사하게 하는 변호사. 정말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이시다. 그리고 첫 기자간담회부터 함께 해 주셨던 희망법의 D변호사님도 고맙다. 변호사가 결코 한가로운 직종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도움을 청하는 손길에 기꺼이 함께 해주시는 변호사가 있다는 것을 D변호사님을 보면서 알았다. 내 경우 학교일 외에 무언가를 해야 할 때 머릿속으로 먼저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 결코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 더군다나 그게 끝이 안 보이는 사회문제라면 얼마나 피곤할 것인가? 그저 중간만 가도 되고 열성적인 다른 사람들한테 편승하면 더 편하니까 비겁하게 외면하곤 했었다. D변호사님을 보면서 많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내가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부터 한빛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정말 지난했다. 진정성 있는 진상규명과 문제해결을 요구한 우리 가족의 호소에 CJ E&M은 한빛의 죽음을 개인적인 문제로 일관했고 회사 책임은 전혀 없다고 통고했다. CJ E&M은 우리 가족을 두 번 죽였지만 남편은 중환자실에 있고 나는 분노와 절망속에서 울고만 있었다. 그들은 거대한 골리앗이었다. 그 괴물앞에서 우리 가족은 한없이 작은 존재였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군대에 있는 한솔이가 나섰다. 한솔이는 휴가 나올 때마다 시간을 쪼개 형과 함께 일했던 회사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솔을 피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은 안하지만 지쳐서 들어오는 한솔이의 절망스런 표정을 볼 때마다 가슴이 무너졌다. 휴가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한데 한솔은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그들을 찾고 찾아갔다. 마침내 용기있게 진실을 말해준 몇몇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회사가 말한 한빛이가 아닌 우리가 알고 있던 한빛으로 한빛을 이야기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확신을 갖고 한빛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그들의 ‘진실을 말하는’ 용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거대한 괴물과 싸울 길을, 실마리를 아예 찾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진실을 말하기’가 그렇게 뜨겁고 대단한 것인 줄 정말 몰랐다.
진실 말하기를 한 그들은 한 청년의 죽음을 부활시켰고 우리 가족에게는 기적의 선물이었다.
- 엄마 김혜영
고맙습니다(3) - 기적의 선물
기자간담회 후 <故이한빛PD 상암동 추모문화제 -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습니다.(2017.4.28)>가 열렸던 날은 4월의 봄날씨가 무색하리만치 엄청 추웠다. 나는 장호원에서 2박3일 연수가 있었기 때문에 진행상황을 알 수 없었고 추모제에 늦지 않게 오라는 연락만 받았다. 가족이 제일 앞장 서서 나서야 하는데 아무 일도 도와주지도 못해 미안했다. 아들의 죽음에 엄마가 밤낮으로 뛰어도 모자랄 판에 매번 다 차려놓은 밥상에 몸만 가서 앉는 것 같았다. 다행히도 집회시작 직전에 상암동에 도착했다. 세 번째 온 상암동. 여전히 낯설었다. 밤에 온 것은 처음이었는데 높은 빌딩들에서 불빛들이 눈이 아프게 쏟아지고 있었다. 너도 나도 내뿜고 있는 하얀 불빛들이 몸서리칠만큼 싫었다. 모든 불빛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 같았다. 빌딩 숲속으로 들어가는 내 모습이 마치 중학교 남학생들이 둥글게 원을 만들어 가운데 앉아있는 술래를 향해 강하게 공을 내리꽂는 놀이 같았다. 피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저 공이 빗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는 술래가 나란 생각이 들었다. 온 몸이 아팠다. 슬펐다.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들이 권력을 휘두르며 그까짓 집회한다고 꿈쩍이라도 할 것 같으냐? 순진하기는 쯧쯧쯧...하며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자꾸 나락으로 떨어지는 감정을 감추고 추모문화제를 기획하고 준비해온 청년유니온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청년유니온 모두가 다 나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CJ E&M앞에는 400개가 넘는 흰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 있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처음에는 의자를 200개 정도 준비했다가 추모인원이 자꾸 늘어나 200여개를 급히 보충했다고 했다.
앞자리에 앉아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데 플라스틱 의자에서 찬 기운이 올라오면서 몸이 덜덜 떨렸다. 흘러내리던 눈물도 뺨에 얼어붙어 얼굴도 얼기 시작했다. 한빛엄마인 나도 이렇게 추워서 뛰쳐 나가고 싶은데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여기 와서 이 추위에 떨고 있는가? 남의 일에. ‘사람’이란 표현을 썼지만 왠지 어색하다. 아니 미안하다. ‘시민?’ ‘청년?’이란 단어가 ‘사람’이란 말보다 더 존경스러운 말이라면 혹시 그 이상의 아름다운 단어가 있다면 그들에게 그 단어를 봉헌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점점 더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앞에 나가 발언할 때 보니 많은 사람들이 서서 함께 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이들에게 보답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그래 끝까지 싸우는 거다. 한빛과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함께 하는데 나는 엄마 아닌가? 한빛에게 갚을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끝까지 쓰러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날 그 매서운 추위를 뛰어넘게 한 사람이 또 있었다. 언어의 온도란 말을 이럴 때 쓰고 싶다. 아님 말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추위를 녹일 만한 열기로 추모객들을 북돋아주었고 나에게도 기죽지 말라고 용기를 준 것은 다산인권센타의 랄라였다. 추모문화제 사회를 맡았던 랄라님의 당찬 목소리가 내 온몸을, 집회현장을 뜨겁게 했다. 랄라는 한빛이 삶을 포기하면서 남긴 메시지를 진정성과 간절함을 담아 외쳤다. 남아있는 우리가 해야 할 책임에 대해 외쳤다.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습니다.’ ‘원래 그런 것은 없습니다’ 등의 구호를 외칠 때마다 나도 눈물이 범벅이 된 채 악을 쓰며 따라 외쳤다. 그래 내 몫이다. 이제는 앞만 보고 가자.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기자간담회때(2017.4.18)도 랄라는 사회를 보았다. 나는 랄라의 본명이 무엇인지 왜 랄라인지 다산인권센타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아무 것도 모른다. 랄라가 일하는 다산인권센타가 35개 대책위의 하나임을 나중에 들었다. 랄라는 기자간담회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빛의 죽음을 공론화하는 이유를 군더더기 없이 명확하게 제시했다. 정말 또렷했고 깔끔했다. 랄라의 발언을 들으며 개인적 슬픔과 분노에 젖어 있던 나는 한빛을 살려야 하고 싸워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후 만났을 때 고맙다는 인사를 했지만 랄라는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랄라같은 사람들과 ‘함께’가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서로를 격려하는지를 보여준 35개 대책위원회 단체들. 추모문화제에 와서 힘을 실어준 많은 사람들. 이들이 있기에 약자들도 숨을 쉴 수 있고 이 사회는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살아가면서 변호사 만날 일이 생전 있을까 했다. 한빛 죽음 후 공론화하기까지 6개월간 진상규명을 위해 개인적으로 함께 해주신 민변의 B변호사님. 참담한 절망 속에 빠져있는 우리 가족에게 지극히 인간적으로 다가오셔서 위로하며 도와주셨다. 대형로펌의 변호사와 TV드라마의 권력을 따라 다니는 변호사만 있는 줄 알았던 촌스런 나에게 B변호사님은 변호사가 아닌 변호인이었다. 당연한 거지만 변호사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또 그 생각과 실천의지가 변호사와 의뢰인과의 관계도 넘어설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B변호사를 보면서 소외자, 서러운 이, 억울한 이가 찾아갈 곳이 이 세상에 있음에 안도했다. 집회 현장에서 만나면 항상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너무 일상적이셔서 그냥 스쳐 지나가다가 ‘아, B변호사님이시지’ 하고 다시 돌아서서 인사하게 하는 변호사. 정말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이시다. 그리고 첫 기자간담회부터 함께 해 주셨던 희망법의 D변호사님도 고맙다. 변호사가 결코 한가로운 직종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도움을 청하는 손길에 기꺼이 함께 해주시는 변호사가 있다는 것을 D변호사님을 보면서 알았다. 내 경우 학교일 외에 무언가를 해야 할 때 머릿속으로 먼저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 결코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으려 했다. 더군다나 그게 끝이 안 보이는 사회문제라면 얼마나 피곤할 것인가? 그저 중간만 가도 되고 열성적인 다른 사람들한테 편승하면 더 편하니까 비겁하게 외면하곤 했었다. D변호사님을 보면서 많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내가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부터 한빛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정말 지난했다. 진정성 있는 진상규명과 문제해결을 요구한 우리 가족의 호소에 CJ E&M은 한빛의 죽음을 개인적인 문제로 일관했고 회사 책임은 전혀 없다고 통고했다. CJ E&M은 우리 가족을 두 번 죽였지만 남편은 중환자실에 있고 나는 분노와 절망속에서 울고만 있었다. 그들은 거대한 골리앗이었다. 그 괴물앞에서 우리 가족은 한없이 작은 존재였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군대에 있는 한솔이가 나섰다. 한솔이는 휴가 나올 때마다 시간을 쪼개 형과 함께 일했던 회사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솔을 피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은 안하지만 지쳐서 들어오는 한솔이의 절망스런 표정을 볼 때마다 가슴이 무너졌다. 휴가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한데 한솔은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그들을 찾고 찾아갔다. 마침내 용기있게 진실을 말해준 몇몇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회사가 말한 한빛이가 아닌 우리가 알고 있던 한빛으로 한빛을 이야기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확신을 갖고 한빛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그들의 ‘진실을 말하는’ 용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거대한 괴물과 싸울 길을, 실마리를 아예 찾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진실을 말하기’가 그렇게 뜨겁고 대단한 것인 줄 정말 몰랐다.
진실 말하기를 한 그들은 한 청년의 죽음을 부활시켰고 우리 가족에게는 기적의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