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김혜영
흔적
한빛이가 없어도 이사를 갈 수 있었다. 하긴 한빛이가 없어도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있다. 가끔 웃기도 했을지 모르겠다. 문득 이런 나에게 혐오감이 밀려온다. ‘한빛이가 없어도’ 살아가네? 한빛 없이도 되는 구나. 한빛이가 없는데도 매일 매일 시간이 지나가고 봄이 되고 겨울이 되었듯이 한빛 없이 이제는 이사도 가네. 한빛은 섭섭하지 않을까? 한빛의 생각을 물어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도 한빛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아침에 잠깐이라도 자고 있는 아이를 깨워 이사갈거라고 통고라도 하고 싶었지만 한빛 방은 언제나처럼 텅 비어 있었다.
3월. 교장 승진발령이 났다. 무척 기뻐할 일이건만 이미 나에게는 무슨 일에든 아무 느낌이 없다. 4년 전 교감승진이 되었을 때는 나도 놀랄 정도로 엄청난 축하를 받았다. 많은 교사들에게 ‘희망(?)’이 되었다며 30년 전 작은 인연이 있었던 교사들도 어떻게 소식을 알았는지 축하를 했다. 실망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다는 답문자를 일일이 썼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보낸다는 꾹꾹 눌러쓴 축하문자를 보면서도 답을 보내지 못했다. 한빛없이도 매일 밥을 먹고 살아가듯이 한빛이가 없는 나에게 교장승진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냥 무심한 일상이다. 오히려 한빛이가 더욱 보고 싶어 사무칠 뿐이다.
고양시 ㅇㅇ중학교로 발령이 났다. 삶에 대한 작은 의욕이나 의미조차 없었기에 어디로 발령이 나건 상관이 없었다. 고양시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도봉동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였기에 그냥 살아지겠지 했다. 그러다 왜 뜬금없이 생소한 고양시일까? 생각해보았다. 지향기도를 안 했지만 하느님은 왜 나를 이곳으로 가라고 했을까? 왜 37년간 한 번도 근무해보지 않은 고양시에서 교직 마무리를 하라고 할까? 몸과 마음이 다 힘든데 익숙한 곳에서 그냥 저냥 편하게 살게 하지. 하는 원망도 잠시 들었었다.
2월 말. 성당에서 묵상하다가 퍼뜩 환경을 바꾸고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내 의지로는 지금 여기를 절대 못 떠날 것이다. 한번 나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아니 매달려보고 싶었다. 그 가느다란 빛이 이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게 주신 은혜 같았다. 슬프면서도 마음이 뜨거워졌다.
더욱이 일산에 와 보니 모든 게 우리 가족을 위해 예비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선 일산에서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있는 상암동이 30분 거리였다. 한빛아빠는 작년 퇴직 후부터 매일 상암동 한빛센터에 나가는데 도봉동과 거리가 멀어서 항상 지쳐보였다. 한빛아빠 건강이 조마조마하던 차였다. 또 신촌에 있는 한솔에게도 일산은 쉽게 왔다갈 수 있을 만큼 가깝고 교통편도 좋았다. 이런 저런 명분을 들이대고 나는 이사를 가자고 했다.
한빛아빠는 무조건 싫다고 했다. 한빛 흔적이 있는 이 집을 어떻게 떠나냐며 울먹울먹 했다. 나는 학교 옆에 살면서 좋은 관리자로 정년을 마무리 하고 싶다고 했다.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결국은 운전이 자신 없으니 2시간 걸리더라도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겠다고 윽박질렀다. 나의 협박에 한빛아빠는 동의했고 급히 일산역, 성당, 학교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솔직히 나도 도봉동 집을 떠난다는 게 두려웠다. 한빛이 중3때 이 아파트에 입주했으니 17년을 살았다. 처음으로 한빛 한솔이 방을 따로 주고 한빛 침대를 사기 위해 포천 가구거리를 몇 번이나 갔었다. 한빛한테 좋은 침대를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사려고 유난을 떨었었다. 도봉동 아파트는 2층 남향이었고 개울물이 앞으로 흐르고 있고 도봉산이 가까웠다. 물론 이런 자연적인 조건보다 더 좋은 것은 버스를 타러가는 한빛이의 뒷모습을 베란다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아이가 대학교에 입학해 원룸을 구할 때와 10년이 지나도 제자리인 아파트 가격얘기가 오갈 때 이사 얘기가 나왔었다. 그럴 때도 나는 여기서 노후까지 살 거라서 이사는 생각조차 안했다. 여하튼 나에게는 최고의 집이었고 그만큼 애정도 깊었다. 한빛을 보낸 후 주변에서는 이사를 권했다. 하지만 꿋꿋이 버텼다. 집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이사 갈 이유가 없었다. 한빛이 와서 우리가 없는 것을 알면 얼마나 어이없을까? 더 이상 미안할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사를 가기로 했다.
짐을 정리하는데 통곡이 절로 나왔다. 한빛 어렸을 때 물건들이 17년 전 여기로 이사올 때 그대로 박스에 담겨있었다. 유치원을 졸업하거나 초등학교 때 학년이 바뀔 때면 한빛이 쓴 그림일기, 공책, 방학과제, 가족 신문, 포트폴리오, 상장 등을 모두 모아두어야 하나 마나로 고민을 했었다. 첫 애라서 그런지 어느 하나 버릴 수가 없었다. 다 소중했고 다 의미가 있었다. 어린 한빛의 예쁘고 귀여운 흔적들이었다. 그렇다고 모아두자니 가뜩이나 좁은 집이 짐으로 가득찰 것 같았다. 아기 앨범도 그렇게 정성을 다해 꾸몄건만 거의 안 보는데 이런 자질구레한 것까지 다 보관해야 하나? 2년마다 이사를 가야하는데. 나중에 한빛이 결혼할 때 선물로 주면 며느리가 감동할까? 정답이 있었으면 했다. 결국 직장을 다니면서 정신없이 살던 내가 내린 결론은 ‘아니다’였다.
잡지에 나오는 대단한 엄마들은 자녀의 배냇저고리까지 다 모아두었던데 나는 엄마로서 최소한의 자격은 있는 건가? 이런 나의 무심함 때문에 한빛이가 잘 크지 못하면 어쩌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많이 불편했다. 아니 어린 한빛한테 미안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은근히 미니멀리즘을 추구했던 것 같다. 그래서 최소한의 것만 남기고 과감히 버렸다. ‘지금 여기’가 중요해 하며 합리화했다. 미련을 버리고 무심해지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빛이 스물일곱 시간만을 남기고 떠난 지금. 나는 가슴을 치며 후회한다. 왜 다 버렸나? 나의 편안함을 위해서?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한빛이 어떤 아들인데 나는 한빛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한빛이한테 많은 것을 받았으면서도 나는 무엇이 그리 무거웠나? 엄마인데도 한 치 앞을 보지 못했다.
17년 전 이사올 때 정리했던 박스안에는 그 시절이 그대로 있었다. 사진과 상장들은 거실과 부엌 벽에 붙여 있던 시간을 상징하듯 파리똥도 묻어 지저분했고 뒷면은 스카치테이프 자국으로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기억이 난다. 그때 사진을 인화해오면 무조건 식탁 벽에 붙였다. 상장도 받아오면 그날로 거실 벽에 붙였다. 결혼 때 선물로 받은 그림액자가 한빛 한솔 상장과 사진에 밀려 베란다로 갔다. 밥을 먹거나 TV를 보다가 누군가가 사진이나 상장에 얽힌 추억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이 이어졌다. 항상 칭찬이 폭풍처럼 따랐다. 그럴 때마다 두 아이는 들떴고 참 행복해했다.
한빛 사진과 어린 시절 물건들을 하나하나 먼지를 닦고 가슴에 품었다. 뜨거웠다. 어린 시절의 한빛이와 스물일곱의 한빛이가 다른 사람 같다. 스물일곱의 한빛은 내 곁을 떠났지만 사진 속의 어린 한빛이는 지금 잘 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엄마 울지 마” 하는 것 같다. 혼란스러웠다
한빛 장례를 치루고 돌아오자마자 한빛 유품을 정리했다. 막 버렸다. 버리라고 했다. 동생이 “언니, 이거는?...” “버려. 버려. 한빛 이제는 없잖아. 그거 있어서 뭐해 한빛이 없는데... 버려. 버려.” 이상하게 마음이 슬프지도 않았다. 한빛아빠가 내 눈치를 살피며 몰래몰래 챙기는 한빛 유품들을 화를 내며 찾아다가 버렸다. 그러고는 나중에는 버리랬다고 버렸냐며 동생들한테 악을 쓰며 울었다. 끌어안고 있어야 했나? 모르겠다. 그때 왜 다 버렸는지. 그냥 내 주관대로 이건 한빛이가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그건 한빛이가 하늘나라 가서도 무거울까봐 버리라고 했다. 한빛한테 한번이라도 물어봤어야 했는데. 이렇게 매사 내 주관대로 한빛을 대하지는 않았을까?
한아름밖에 남지 않은 한빛의 어린 시절, 한빛의 흔적을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 한빛아 미.안.해.
- 엄마 김혜영
흔적
한빛이가 없어도 이사를 갈 수 있었다. 하긴 한빛이가 없어도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있다. 가끔 웃기도 했을지 모르겠다. 문득 이런 나에게 혐오감이 밀려온다. ‘한빛이가 없어도’ 살아가네? 한빛 없이도 되는 구나. 한빛이가 없는데도 매일 매일 시간이 지나가고 봄이 되고 겨울이 되었듯이 한빛 없이 이제는 이사도 가네. 한빛은 섭섭하지 않을까? 한빛의 생각을 물어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도 한빛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아침에 잠깐이라도 자고 있는 아이를 깨워 이사갈거라고 통고라도 하고 싶었지만 한빛 방은 언제나처럼 텅 비어 있었다.
3월. 교장 승진발령이 났다. 무척 기뻐할 일이건만 이미 나에게는 무슨 일에든 아무 느낌이 없다. 4년 전 교감승진이 되었을 때는 나도 놀랄 정도로 엄청난 축하를 받았다. 많은 교사들에게 ‘희망(?)’이 되었다며 30년 전 작은 인연이 있었던 교사들도 어떻게 소식을 알았는지 축하를 했다. 실망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다는 답문자를 일일이 썼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보낸다는 꾹꾹 눌러쓴 축하문자를 보면서도 답을 보내지 못했다. 한빛없이도 매일 밥을 먹고 살아가듯이 한빛이가 없는 나에게 교장승진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냥 무심한 일상이다. 오히려 한빛이가 더욱 보고 싶어 사무칠 뿐이다.
고양시 ㅇㅇ중학교로 발령이 났다. 삶에 대한 작은 의욕이나 의미조차 없었기에 어디로 발령이 나건 상관이 없었다. 고양시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도봉동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였기에 그냥 살아지겠지 했다. 그러다 왜 뜬금없이 생소한 고양시일까? 생각해보았다. 지향기도를 안 했지만 하느님은 왜 나를 이곳으로 가라고 했을까? 왜 37년간 한 번도 근무해보지 않은 고양시에서 교직 마무리를 하라고 할까? 몸과 마음이 다 힘든데 익숙한 곳에서 그냥 저냥 편하게 살게 하지. 하는 원망도 잠시 들었었다.
2월 말. 성당에서 묵상하다가 퍼뜩 환경을 바꾸고 나름대로 정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내 의지로는 지금 여기를 절대 못 떠날 것이다. 한번 나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아니 매달려보고 싶었다. 그 가느다란 빛이 이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게 주신 은혜 같았다. 슬프면서도 마음이 뜨거워졌다.
더욱이 일산에 와 보니 모든 게 우리 가족을 위해 예비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선 일산에서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있는 상암동이 30분 거리였다. 한빛아빠는 작년 퇴직 후부터 매일 상암동 한빛센터에 나가는데 도봉동과 거리가 멀어서 항상 지쳐보였다. 한빛아빠 건강이 조마조마하던 차였다. 또 신촌에 있는 한솔에게도 일산은 쉽게 왔다갈 수 있을 만큼 가깝고 교통편도 좋았다. 이런 저런 명분을 들이대고 나는 이사를 가자고 했다.
한빛아빠는 무조건 싫다고 했다. 한빛 흔적이 있는 이 집을 어떻게 떠나냐며 울먹울먹 했다. 나는 학교 옆에 살면서 좋은 관리자로 정년을 마무리 하고 싶다고 했다.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결국은 운전이 자신 없으니 2시간 걸리더라도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겠다고 윽박질렀다. 나의 협박에 한빛아빠는 동의했고 급히 일산역, 성당, 학교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솔직히 나도 도봉동 집을 떠난다는 게 두려웠다. 한빛이 중3때 이 아파트에 입주했으니 17년을 살았다. 처음으로 한빛 한솔이 방을 따로 주고 한빛 침대를 사기 위해 포천 가구거리를 몇 번이나 갔었다. 한빛한테 좋은 침대를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사려고 유난을 떨었었다. 도봉동 아파트는 2층 남향이었고 개울물이 앞으로 흐르고 있고 도봉산이 가까웠다. 물론 이런 자연적인 조건보다 더 좋은 것은 버스를 타러가는 한빛이의 뒷모습을 베란다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아이가 대학교에 입학해 원룸을 구할 때와 10년이 지나도 제자리인 아파트 가격얘기가 오갈 때 이사 얘기가 나왔었다. 그럴 때도 나는 여기서 노후까지 살 거라서 이사는 생각조차 안했다. 여하튼 나에게는 최고의 집이었고 그만큼 애정도 깊었다. 한빛을 보낸 후 주변에서는 이사를 권했다. 하지만 꿋꿋이 버텼다. 집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이사 갈 이유가 없었다. 한빛이 와서 우리가 없는 것을 알면 얼마나 어이없을까? 더 이상 미안할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사를 가기로 했다.
짐을 정리하는데 통곡이 절로 나왔다. 한빛 어렸을 때 물건들이 17년 전 여기로 이사올 때 그대로 박스에 담겨있었다. 유치원을 졸업하거나 초등학교 때 학년이 바뀔 때면 한빛이 쓴 그림일기, 공책, 방학과제, 가족 신문, 포트폴리오, 상장 등을 모두 모아두어야 하나 마나로 고민을 했었다. 첫 애라서 그런지 어느 하나 버릴 수가 없었다. 다 소중했고 다 의미가 있었다. 어린 한빛의 예쁘고 귀여운 흔적들이었다. 그렇다고 모아두자니 가뜩이나 좁은 집이 짐으로 가득찰 것 같았다. 아기 앨범도 그렇게 정성을 다해 꾸몄건만 거의 안 보는데 이런 자질구레한 것까지 다 보관해야 하나? 2년마다 이사를 가야하는데. 나중에 한빛이 결혼할 때 선물로 주면 며느리가 감동할까? 정답이 있었으면 했다. 결국 직장을 다니면서 정신없이 살던 내가 내린 결론은 ‘아니다’였다.
잡지에 나오는 대단한 엄마들은 자녀의 배냇저고리까지 다 모아두었던데 나는 엄마로서 최소한의 자격은 있는 건가? 이런 나의 무심함 때문에 한빛이가 잘 크지 못하면 어쩌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많이 불편했다. 아니 어린 한빛한테 미안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은근히 미니멀리즘을 추구했던 것 같다. 그래서 최소한의 것만 남기고 과감히 버렸다. ‘지금 여기’가 중요해 하며 합리화했다. 미련을 버리고 무심해지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빛이 스물일곱 시간만을 남기고 떠난 지금. 나는 가슴을 치며 후회한다. 왜 다 버렸나? 나의 편안함을 위해서?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한빛이 어떤 아들인데 나는 한빛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한빛이한테 많은 것을 받았으면서도 나는 무엇이 그리 무거웠나? 엄마인데도 한 치 앞을 보지 못했다.
17년 전 이사올 때 정리했던 박스안에는 그 시절이 그대로 있었다. 사진과 상장들은 거실과 부엌 벽에 붙여 있던 시간을 상징하듯 파리똥도 묻어 지저분했고 뒷면은 스카치테이프 자국으로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기억이 난다. 그때 사진을 인화해오면 무조건 식탁 벽에 붙였다. 상장도 받아오면 그날로 거실 벽에 붙였다. 결혼 때 선물로 받은 그림액자가 한빛 한솔 상장과 사진에 밀려 베란다로 갔다. 밥을 먹거나 TV를 보다가 누군가가 사진이나 상장에 얽힌 추억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이 이어졌다. 항상 칭찬이 폭풍처럼 따랐다. 그럴 때마다 두 아이는 들떴고 참 행복해했다.
한빛 사진과 어린 시절 물건들을 하나하나 먼지를 닦고 가슴에 품었다. 뜨거웠다. 어린 시절의 한빛이와 스물일곱의 한빛이가 다른 사람 같다. 스물일곱의 한빛은 내 곁을 떠났지만 사진 속의 어린 한빛이는 지금 잘 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엄마 울지 마” 하는 것 같다. 혼란스러웠다
한빛 장례를 치루고 돌아오자마자 한빛 유품을 정리했다. 막 버렸다. 버리라고 했다. 동생이 “언니, 이거는?...” “버려. 버려. 한빛 이제는 없잖아. 그거 있어서 뭐해 한빛이 없는데... 버려. 버려.” 이상하게 마음이 슬프지도 않았다. 한빛아빠가 내 눈치를 살피며 몰래몰래 챙기는 한빛 유품들을 화를 내며 찾아다가 버렸다. 그러고는 나중에는 버리랬다고 버렸냐며 동생들한테 악을 쓰며 울었다. 끌어안고 있어야 했나? 모르겠다. 그때 왜 다 버렸는지. 그냥 내 주관대로 이건 한빛이가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아서, 그건 한빛이가 하늘나라 가서도 무거울까봐 버리라고 했다. 한빛한테 한번이라도 물어봤어야 했는데. 이렇게 매사 내 주관대로 한빛을 대하지는 않았을까?
한아름밖에 남지 않은 한빛의 어린 시절, 한빛의 흔적을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 한빛아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