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김혜영
민속촌(1) - 누렁송아지
1990년대에는 실용적으로 입을 수 있는 한복이 확산되면서 생활한복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의 국제화인지 전통문화 살리기였는지 우리옷 입기 운동이었는지 모르나 생활한복을 입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우리는 드레스 대신 한복결혼식을 했기에 이런 변화가 자연스러웠고 반가웠다. 특히 한빛아빠는 한복이 잘 어울렸기 때문에 계절 별로 장만해 일상적으로 입었다. 그러다 보니 한빛 한솔도 자연스럽게 생활한복을 입었다. 전통한복처럼 불편하지도 않아 교복처럼 입었다. 개량한복과의 차별성 때문에 가격은 엄청 비쌌지만 어린이 생활한복을 입은 한빛 한솔이가 참 보기 좋았다.
6학년때 한빛이는 전교회장 선거에 나갔다. 운동장 조회때 정견발표하러 연단에 올랐는데 아이들 중 누군가가 나무꾼이라고 말해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고 했다. 이후부터는 아이들이 한빛이 지나갈 때면 ‘나무꾼과 선녀’라며 선녀는 어디 갔느냐고 하거나 금도끼, 은도끼는 찾아왔냐며 놀린다고 했다. 심지어 머슴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아차 했다. 나는 생활한복이 한빛 한솔에게 잘 어울린다고만 생각했다. 결혼식때말고는 한복을 입어본 적이 없는 나는 생활한복이 자연스럽고 멋지게 어울리는 모습이 그저 부러웠다. 촌스럽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했다. 그러나 나와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음을 알았다. 한빛은 그날부터 생활한복 입기를 싫어했다. 가격이 고가여도 친환경적 이미지가 있어 나 스스로 만족했고 그동안 아이들 옷 걱정을 안했기에 난감했다. 나의 무딘 패션 감각도 겁났다. 다른 종류의 옷을 잘 사 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좋다고 어른의 생각을 아이한테 강요할 수는 없었다. 한빛한테 미안하다고 말했고 생활한복은 장롱 깊숙이 들어갔다.
네 살 때인가 어린이집 다닐 때였다. 노래부르는 시간에 한빛은 송아지 노래를 불렀다.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 엄마소도 누렁소 엄마 닮았네” 하자 친구들이 깔깔깔 웃으며 누렁송아지래 얼룩송아진대 하더랜다. 그날 저녁 “엄마, 애들이 누렁송아지가 아니래. 얼룩송아지래. 얼룩송아지가 뭐야?”하길래 그림책에 있는 초원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 젖소를 가르쳐줬다. 지금은 치즈만들기 체험이나 목장체험학습이 활발해 어렸을 때부터 젖소를 볼 수 있지만 그때는 어른인 나도 젖소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 시골에는 누렁소 밖에 없었다. 목장도 없었다. 한빛이가 할아버지 댁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국어시간에 ‘우리 것 찾기’ 수업을 하면서 중학생들과 누렁송아지 이야기를 했다. 학생들은 얼룩소를 누렁소로 바꿔 노래를 불렀다. 나도 한빛에게 산토끼, 학교종이 땡땡땡 등 노래를 가르쳐주면서 얼룩송아지를 누렁송아지로 노가바해서 가르쳐 주었다. 그러니 한빛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누렁송아지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빛을 낳았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한 사람은 딸만 여섯을 둔 친정엄마였다. 둘째 한솔이를 낳았을 때 모든 사람들은 딸이 아닌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노후에는 딸이 있어야 하는데, 아들만 둘이면 뭐하나? 삭막할 텐데 했다. 그때도 친정엄마는 아니라며 아들 욕심을 냈다. 나역시 두 아이가 아들인 것에 안도했다. 한빛아빠가 장손이거나 친정엄마처럼 아들선호사상 때문이 아니다. 여자 아이의 긴 머리를 빗어주거나 예쁜 리본으로 묶어주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레이스가 있는 치마를 입히고 꽃그림 신발을 골라 신겨야 하는 것도 부담이 되었다. 동화책을 연극적으로 사실감 있게 낭독해주는 것은 할 수 있어도 인형옷을 갈아입히며 인형놀이를 하는 것은 나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한빛 한솔을 거울 앞에 얌전히 앉혀놓고 가지런히 머리를 빗어 준 기억은 거의 없다. 우리 집 화장대에는 빗이 없었다. 남편은 머리카락이 거의 없었고(?) 나도 그때는 손으로 파마머리를 쓱쓱 넘기는 게 유행이던 시절이었기에 빗이 없어도 별 불편을 몰랐다. 남자아이들은 머리를 감아도 수건으로 물기만 후다닥 털어주면 되는 것으로 알았다.
아침 출근준비로 바쁠 때 한빛이 “엄마, 양말”했다. 서랍을 열어보니 짝이 맞춰 있는 양말이 하나도 없었다. 세탁기 돌리는 것을 미룬 탓이다. 시간은 없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짝짝이 양말을 주었다. 색깔이 다르다고 하는 한빛에게 “요즘 이렇게 다른 색깔 양말을 신는 게 유행이야. 예쁘고 특이하잖아?” 하며 설득(?)을 했다. 그리고 나도 별 수 없이 짝짝이 양말을 신었다. 착한 한빛은 엄마말을 그대로 믿었다. 파랑 노랑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신나게 뛰어나가는 한빛을 보면서 ‘으이구, 이러고도 엄마라고 할 수 있나? 어제 저녁 뭐 대단한 일이라도 했나? 세탁기 하나도 못 돌리게?’ 하며 자책했다.
그날 한빛은 학교에 가서 아이들 놀림은 받지 않았을까? 어떻게 보면 이 일은 엄마역할을 못한 그 수많은 것 중 아주 작은 일인데도 자꾸 생각이 났다. 이상하게 한빛이 커서도 미안했고 걱정도 되었다. 한빛은 기억나지 않는다며 웃었다.
어제 한빛아빠한테 이 얘기를 했다. 내가 털고 싶어서일까? “한빛은 엄마를 무조건 믿었잖아. 당신은 행복했지. 전폭적으로 두 아들의 신뢰를 받았으니까. 당신이 그만큼 아이들한테 최선을 다했으니까 당연한 거지만. 아마 한빛은 아닌 줄 알면서도 엄마를 행복하게 하려고 설득당한 것처럼 했을 거야. 한빛은 당신을 좋아했잖아.”
엄마가 짝짝이로 양말을 신는 것을 휘둥그레 보고는 얼른 자기도 짝짝이로 신던 그때 그 순진한 눈빛과 엄마의 말을 진짜로 믿고 의심없이 따라 하던 한빛. 지금까지도 마음에 걸린다. 어린 한빛에게 착한 아들이 되도록 암암리에 강요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한빛 때문에 너무 행복했던 것도 미안하다.
한빛은 나에게 또 가르침을 주고 갔다. 그러나 절대로 원상회복이 될 수 없는, 10월 그 이전으로 절대로 돌아갈 수 없게 하면서까지 엄마를 가르쳐야 했을까? 엄마는 너를 보내고야 깨달았다. 이럴 거면 엄마는 영원히 무식해도 되는데. 깨닫지 못해도 되는데. 엄마는 행복하지 않아도 되는데.
- 엄마 김혜영
민속촌(1) - 누렁송아지
1990년대에는 실용적으로 입을 수 있는 한복이 확산되면서 생활한복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의 국제화인지 전통문화 살리기였는지 우리옷 입기 운동이었는지 모르나 생활한복을 입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우리는 드레스 대신 한복결혼식을 했기에 이런 변화가 자연스러웠고 반가웠다. 특히 한빛아빠는 한복이 잘 어울렸기 때문에 계절 별로 장만해 일상적으로 입었다. 그러다 보니 한빛 한솔도 자연스럽게 생활한복을 입었다. 전통한복처럼 불편하지도 않아 교복처럼 입었다. 개량한복과의 차별성 때문에 가격은 엄청 비쌌지만 어린이 생활한복을 입은 한빛 한솔이가 참 보기 좋았다.
6학년때 한빛이는 전교회장 선거에 나갔다. 운동장 조회때 정견발표하러 연단에 올랐는데 아이들 중 누군가가 나무꾼이라고 말해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고 했다. 이후부터는 아이들이 한빛이 지나갈 때면 ‘나무꾼과 선녀’라며 선녀는 어디 갔느냐고 하거나 금도끼, 은도끼는 찾아왔냐며 놀린다고 했다. 심지어 머슴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아차 했다. 나는 생활한복이 한빛 한솔에게 잘 어울린다고만 생각했다. 결혼식때말고는 한복을 입어본 적이 없는 나는 생활한복이 자연스럽고 멋지게 어울리는 모습이 그저 부러웠다. 촌스럽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했다. 그러나 나와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음을 알았다. 한빛은 그날부터 생활한복 입기를 싫어했다. 가격이 고가여도 친환경적 이미지가 있어 나 스스로 만족했고 그동안 아이들 옷 걱정을 안했기에 난감했다. 나의 무딘 패션 감각도 겁났다. 다른 종류의 옷을 잘 사 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좋다고 어른의 생각을 아이한테 강요할 수는 없었다. 한빛한테 미안하다고 말했고 생활한복은 장롱 깊숙이 들어갔다.
네 살 때인가 어린이집 다닐 때였다. 노래부르는 시간에 한빛은 송아지 노래를 불렀다.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 엄마소도 누렁소 엄마 닮았네” 하자 친구들이 깔깔깔 웃으며 누렁송아지래 얼룩송아진대 하더랜다. 그날 저녁 “엄마, 애들이 누렁송아지가 아니래. 얼룩송아지래. 얼룩송아지가 뭐야?”하길래 그림책에 있는 초원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 젖소를 가르쳐줬다. 지금은 치즈만들기 체험이나 목장체험학습이 활발해 어렸을 때부터 젖소를 볼 수 있지만 그때는 어른인 나도 젖소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 시골에는 누렁소 밖에 없었다. 목장도 없었다. 한빛이가 할아버지 댁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국어시간에 ‘우리 것 찾기’ 수업을 하면서 중학생들과 누렁송아지 이야기를 했다. 학생들은 얼룩소를 누렁소로 바꿔 노래를 불렀다. 나도 한빛에게 산토끼, 학교종이 땡땡땡 등 노래를 가르쳐주면서 얼룩송아지를 누렁송아지로 노가바해서 가르쳐 주었다. 그러니 한빛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누렁송아지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빛을 낳았을 때 누구보다도 기뻐한 사람은 딸만 여섯을 둔 친정엄마였다. 둘째 한솔이를 낳았을 때 모든 사람들은 딸이 아닌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노후에는 딸이 있어야 하는데, 아들만 둘이면 뭐하나? 삭막할 텐데 했다. 그때도 친정엄마는 아니라며 아들 욕심을 냈다. 나역시 두 아이가 아들인 것에 안도했다. 한빛아빠가 장손이거나 친정엄마처럼 아들선호사상 때문이 아니다. 여자 아이의 긴 머리를 빗어주거나 예쁜 리본으로 묶어주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레이스가 있는 치마를 입히고 꽃그림 신발을 골라 신겨야 하는 것도 부담이 되었다. 동화책을 연극적으로 사실감 있게 낭독해주는 것은 할 수 있어도 인형옷을 갈아입히며 인형놀이를 하는 것은 나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한빛 한솔을 거울 앞에 얌전히 앉혀놓고 가지런히 머리를 빗어 준 기억은 거의 없다. 우리 집 화장대에는 빗이 없었다. 남편은 머리카락이 거의 없었고(?) 나도 그때는 손으로 파마머리를 쓱쓱 넘기는 게 유행이던 시절이었기에 빗이 없어도 별 불편을 몰랐다. 남자아이들은 머리를 감아도 수건으로 물기만 후다닥 털어주면 되는 것으로 알았다.
아침 출근준비로 바쁠 때 한빛이 “엄마, 양말”했다. 서랍을 열어보니 짝이 맞춰 있는 양말이 하나도 없었다. 세탁기 돌리는 것을 미룬 탓이다. 시간은 없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짝짝이 양말을 주었다. 색깔이 다르다고 하는 한빛에게 “요즘 이렇게 다른 색깔 양말을 신는 게 유행이야. 예쁘고 특이하잖아?” 하며 설득(?)을 했다. 그리고 나도 별 수 없이 짝짝이 양말을 신었다. 착한 한빛은 엄마말을 그대로 믿었다. 파랑 노랑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 신나게 뛰어나가는 한빛을 보면서 ‘으이구, 이러고도 엄마라고 할 수 있나? 어제 저녁 뭐 대단한 일이라도 했나? 세탁기 하나도 못 돌리게?’ 하며 자책했다.
그날 한빛은 학교에 가서 아이들 놀림은 받지 않았을까? 어떻게 보면 이 일은 엄마역할을 못한 그 수많은 것 중 아주 작은 일인데도 자꾸 생각이 났다. 이상하게 한빛이 커서도 미안했고 걱정도 되었다. 한빛은 기억나지 않는다며 웃었다.
어제 한빛아빠한테 이 얘기를 했다. 내가 털고 싶어서일까? “한빛은 엄마를 무조건 믿었잖아. 당신은 행복했지. 전폭적으로 두 아들의 신뢰를 받았으니까. 당신이 그만큼 아이들한테 최선을 다했으니까 당연한 거지만. 아마 한빛은 아닌 줄 알면서도 엄마를 행복하게 하려고 설득당한 것처럼 했을 거야. 한빛은 당신을 좋아했잖아.”
엄마가 짝짝이로 양말을 신는 것을 휘둥그레 보고는 얼른 자기도 짝짝이로 신던 그때 그 순진한 눈빛과 엄마의 말을 진짜로 믿고 의심없이 따라 하던 한빛. 지금까지도 마음에 걸린다. 어린 한빛에게 착한 아들이 되도록 암암리에 강요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한빛 때문에 너무 행복했던 것도 미안하다.
한빛은 나에게 또 가르침을 주고 갔다. 그러나 절대로 원상회복이 될 수 없는, 10월 그 이전으로 절대로 돌아갈 수 없게 하면서까지 엄마를 가르쳐야 했을까? 엄마는 너를 보내고야 깨달았다. 이럴 거면 엄마는 영원히 무식해도 되는데. 깨닫지 못해도 되는데. 엄마는 행복하지 않아도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