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김혜영
미안하다(3) - 부부싸움
한빛은 의정부교구 신곡2동 성당 <하늘의 문>에 있다. 매달 둘째, 넷째 토요일에는 <하늘의 문> 영혼을 위한 추모미사가 있는데 신부님께서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을 기억하시며 강론을 하셨다. 신부님께서는 아버님이 물려주신 세 가지에 감사를 표하셨다. 아버님이 참 신앙인이셨던 것, 유산을 하나도 남기지 않으신 것, 자식들에게 어떠한 폭력, 언어폭력도 행하지 않고 키우신 것이라고 했다.
그래. 그러니까 신부님같은 훌륭한 자식이 있는 거겠지. 아니 훌륭한 아버지이기에 자식이 잘 성장한 거겠지. 부러움과 함께 울컥 회한의 눈물이 솟는다. 한빛이가 좋은 엄마를 만났다면 그렇게 일찍 갔을까? 도대체 나는 엄마로서 뭔가? 뭐하나 제대로 한 게 있나? 한빛에게도 엄마를 기억할 때 감사할 일이 하나라도 있을까? 엄마 죽은 다음에 기억하지 말고 지금 솔직히 말해달라고 노골적으로 물어보고 싶다. 그러나 지금 한빛은 내 곁에 없다.
아직도 마음에 가장 걸리는 것은 어린 한빛 한솔 앞에서 너무나 많이 거침없이(?) 했던 부부싸움이다. 계속 마음에 걸렸다. 옳지 않음을 알기에 결혼을 앞둔 후배들에게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로 부부싸움을 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강조했다.
한빛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이 부분을 진심으로 사과했다. 너는 결혼하면 엄마처럼 하지 마. 갈등이 생기면 아이들이 안 보는 학교운동장이나 놀이터로 가 소리 지르고 싸우라고 했다. 아이들에게는 엄마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절대로 보여주지 말라고 했다. 너에게 상처로 남아 앞으로의 삶에 나쁜 영향을 줄까봐 걱정되고 미안하다고 했다. 다 잊어줄래? 하고 구걸하듯이(?) 사과했다. “괜찮아요. 엄마. 부부관계라는 게 다 그렇지요.” 하며 쿨하게 면죄 해주면 좋으련만 한빛은 내 눈을 피하며 웃었다. 찝찝했지만 웃은 걸로 나혼자 퉁쳤다.
한빛아빠는 가사와 육아는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빛아빠 세대관으로는 획기적이었기에 후배교사들조차 한빛아빠를 ‘특별한 인종’이라고 했다. 친정엄마조차도 한빛아빠를 칭찬했다. 사위가 저렇게 아이들한테 잘 하니 당신 딸이 덜 힘들 것이라는 이기적 마음이 크셨을 것이다. 당시 90년대 초기는 여성운동이 활발하게 시작되던 때라 맞벌이 가정마다 가사노동과 육아가 주된 화제였다. 모두들 여자가 전담하는 것에 대해 불만과 분노를 토했다. 나만 내 남편은 안 그래요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렇게 싸웠을까? 89년 8월에 한빛아빠는 전교조관련으로 해직이 되었다. 한빛이가 7개월 되었을 때다. 그리고 5년을 거리의 교사로 살았고 복직하고도 전교조 본부에서 일하면서 활동가의 삶을 살았다. 활동가의 삶은 퇴근이 늦고 휴일이 없다. 여행이나 가족행사도 계획할 수 없다. 항상 돌발사건이 생긴다. 그러면 여행준비를 완료하고도 한빛아빠는 급히 나가야 했다. 나는 들떠서 싸놓은 짐들을 그대로 풀어놓은 채 화가 나 있고 두 아이는 내 눈치를 살폈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런 상황에 진저리가 났다.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아이들은 뭔가? 그때마다 싸웠다.
한빛아빠 해직 후 많은 해직교사를 만났다. 그들의 삶을 보면서 딴 세상에 온 것 같았고 외계인들을 만난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나는 매우 평범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방 국립사범대를 나온 나는 TV뉴스나 신문기사는 정의로운 것이고 사실만을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믿었다. 집회참석을 하고 저녁에 뉴스를 보면서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 진리가 아님에 배신감을 느꼈다. 갈팡질팡했다.
처음 접해보는 활동가들의 삶이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그래서 한빛아빠와 더 많이 싸웠던 것 같다. 한빛아빠는 그 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는데 나는 많은 것을 요구했다. 한빛 한솔한테는 좋은 아빠가 되어야 한다고 다구쳤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한빛아빠를 거리로 나가게 했고 우리는 그때마다 부딪쳤다. 서로에게 상처받고 이해하고 사과하고 또 싸웠다. 내가 의식이 없었고 욕심이 많았기 때문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한빛과 한솔한테 지금까지 미안하다.
아직도 나는 활동가들의 삶이 조마조마하다. 혹시 그네들도 우리처럼 좋은 시간을 부부싸움으로 소진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가정이 깨지고 이혼하면 어쩌지? 아이들이 받을 상처는? 부모의 갈등은 모든 가정에서 있을 수 있겠지만 소심한 나는 혼자 걱정하고 걱정한다. 활동가들의 삶이 안쓰러워서이다.
그냥 랄랄라 꿀꿀꿀하며 살 수도 있는데 활동가들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모처럼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할 때도 TV에서 흘러나오는 거짓뉴스 때문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깨진다. 해결의 희망이 보이지 않음에도 싸워야 하는 현안 문제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우울하고 슬프다. 어린 아이들에게 그런 아빠 엄마를 이해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가끔 젊은 활동가를 만나 이런 걱정으로 다가가면 그네들은 당연한 일상인걸요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거짓말이 아니기를 혼자 바라고 믿을 뿐이다.
지금은 한빛아빠와 싸울 일도, 싸울 힘도 없다. 그래서 한빛에게 더 미안하다.
- 엄마 김혜영
미안하다(3) - 부부싸움
한빛은 의정부교구 신곡2동 성당 <하늘의 문>에 있다. 매달 둘째, 넷째 토요일에는 <하늘의 문> 영혼을 위한 추모미사가 있는데 신부님께서 얼마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을 기억하시며 강론을 하셨다. 신부님께서는 아버님이 물려주신 세 가지에 감사를 표하셨다. 아버님이 참 신앙인이셨던 것, 유산을 하나도 남기지 않으신 것, 자식들에게 어떠한 폭력, 언어폭력도 행하지 않고 키우신 것이라고 했다.
그래. 그러니까 신부님같은 훌륭한 자식이 있는 거겠지. 아니 훌륭한 아버지이기에 자식이 잘 성장한 거겠지. 부러움과 함께 울컥 회한의 눈물이 솟는다. 한빛이가 좋은 엄마를 만났다면 그렇게 일찍 갔을까? 도대체 나는 엄마로서 뭔가? 뭐하나 제대로 한 게 있나? 한빛에게도 엄마를 기억할 때 감사할 일이 하나라도 있을까? 엄마 죽은 다음에 기억하지 말고 지금 솔직히 말해달라고 노골적으로 물어보고 싶다. 그러나 지금 한빛은 내 곁에 없다.
아직도 마음에 가장 걸리는 것은 어린 한빛 한솔 앞에서 너무나 많이 거침없이(?) 했던 부부싸움이다. 계속 마음에 걸렸다. 옳지 않음을 알기에 결혼을 앞둔 후배들에게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로 부부싸움을 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강조했다.
한빛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이 부분을 진심으로 사과했다. 너는 결혼하면 엄마처럼 하지 마. 갈등이 생기면 아이들이 안 보는 학교운동장이나 놀이터로 가 소리 지르고 싸우라고 했다. 아이들에게는 엄마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절대로 보여주지 말라고 했다. 너에게 상처로 남아 앞으로의 삶에 나쁜 영향을 줄까봐 걱정되고 미안하다고 했다. 다 잊어줄래? 하고 구걸하듯이(?) 사과했다. “괜찮아요. 엄마. 부부관계라는 게 다 그렇지요.” 하며 쿨하게 면죄 해주면 좋으련만 한빛은 내 눈을 피하며 웃었다. 찝찝했지만 웃은 걸로 나혼자 퉁쳤다.
한빛아빠는 가사와 육아는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빛아빠 세대관으로는 획기적이었기에 후배교사들조차 한빛아빠를 ‘특별한 인종’이라고 했다. 친정엄마조차도 한빛아빠를 칭찬했다. 사위가 저렇게 아이들한테 잘 하니 당신 딸이 덜 힘들 것이라는 이기적 마음이 크셨을 것이다. 당시 90년대 초기는 여성운동이 활발하게 시작되던 때라 맞벌이 가정마다 가사노동과 육아가 주된 화제였다. 모두들 여자가 전담하는 것에 대해 불만과 분노를 토했다. 나만 내 남편은 안 그래요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렇게 싸웠을까? 89년 8월에 한빛아빠는 전교조관련으로 해직이 되었다. 한빛이가 7개월 되었을 때다. 그리고 5년을 거리의 교사로 살았고 복직하고도 전교조 본부에서 일하면서 활동가의 삶을 살았다. 활동가의 삶은 퇴근이 늦고 휴일이 없다. 여행이나 가족행사도 계획할 수 없다. 항상 돌발사건이 생긴다. 그러면 여행준비를 완료하고도 한빛아빠는 급히 나가야 했다. 나는 들떠서 싸놓은 짐들을 그대로 풀어놓은 채 화가 나 있고 두 아이는 내 눈치를 살폈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런 상황에 진저리가 났다.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아이들은 뭔가? 그때마다 싸웠다.
한빛아빠 해직 후 많은 해직교사를 만났다. 그들의 삶을 보면서 딴 세상에 온 것 같았고 외계인들을 만난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나는 매우 평범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방 국립사범대를 나온 나는 TV뉴스나 신문기사는 정의로운 것이고 사실만을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믿었다. 집회참석을 하고 저녁에 뉴스를 보면서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 진리가 아님에 배신감을 느꼈다. 갈팡질팡했다.
처음 접해보는 활동가들의 삶이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그래서 한빛아빠와 더 많이 싸웠던 것 같다. 한빛아빠는 그 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는데 나는 많은 것을 요구했다. 한빛 한솔한테는 좋은 아빠가 되어야 한다고 다구쳤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한빛아빠를 거리로 나가게 했고 우리는 그때마다 부딪쳤다. 서로에게 상처받고 이해하고 사과하고 또 싸웠다. 내가 의식이 없었고 욕심이 많았기 때문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한빛과 한솔한테 지금까지 미안하다.
아직도 나는 활동가들의 삶이 조마조마하다. 혹시 그네들도 우리처럼 좋은 시간을 부부싸움으로 소진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가정이 깨지고 이혼하면 어쩌지? 아이들이 받을 상처는? 부모의 갈등은 모든 가정에서 있을 수 있겠지만 소심한 나는 혼자 걱정하고 걱정한다. 활동가들의 삶이 안쓰러워서이다.
그냥 랄랄라 꿀꿀꿀하며 살 수도 있는데 활동가들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모처럼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할 때도 TV에서 흘러나오는 거짓뉴스 때문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깨진다. 해결의 희망이 보이지 않음에도 싸워야 하는 현안 문제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우울하고 슬프다. 어린 아이들에게 그런 아빠 엄마를 이해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가끔 젊은 활동가를 만나 이런 걱정으로 다가가면 그네들은 당연한 일상인걸요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거짓말이 아니기를 혼자 바라고 믿을 뿐이다.
지금은 한빛아빠와 싸울 일도, 싸울 힘도 없다. 그래서 한빛에게 더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