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김혜영
겁많고 여렸는데...
세월호 5주기인 지난 4월 16일. 나는 교원대에서 ‘탈북학생 이해 제고를 위한 관리자 연수’를 받고 있었다. 주제가 낯설어서인지 연수기간 내내 부담스러웠다. 특히 전날 밤 통일전담교육사 네 분의 토크쇼를 듣고는 더 그랬다. 북한에서 여교사였던 교육사들이 탈북하여 남한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들었는데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또다른 세계가 있었다. 왜 이리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가?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살게 했나 하는 생각으로 혼란스러웠고 우울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탈북문제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충격도 컸던 것 같다.
그러다 휴식시간에 무심코 스마트폰을 켰다. 세월호 관련 기사가 눈에 많이 띄었다. 아, 오늘이 4월 16일이구나. 하나를 눌렀다. 무슨 제목이었는지는 모르나 세월호에서 자식을 잃은 엄마의 인터뷰내용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대더니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옆자리 연수생이 눈치 못 채게 심호흡을 크게 했다. ‘왜 이러지? 그동안 한빛을 보내고 힘들었던 게 지금 나타나나? 아냐. 일시적일거야. 연수주제가 버거워서 그런 거야. 정신 차리자’ 하며 나를 다독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연수를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하는데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연수 마지막 날이라 곧바로 오송역으로 갔다.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 물을 몇 번씩 내리며 한참을 울었다.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질식할 것 같은 상태는 그대로였다. 기차에 올라서도 옆에 누가 앉았건 눈치 볼 것도 없이 소리 내어 울었다. 그래야 살 것 같았다. 쓰러지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기에 창피하지도 않았다.
한빛아빠와 한솔은 안산 추모제에 갔기에 내가 도착하는 시간까지 행신역에 올 수가 없었다. 불안감과 함께 점점 더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한빛한테 약속한 게 있기에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어 온 힘을 다해 정신을 붙들었다. Y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행신역까지 나와 달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나오신 선생님 차에 올라 응급실로 가달라고 하고 대성통곡을 했다. 목이 쉬고 머리가 깨지도록 울었다. 제발 가슴아 뚫려라 하며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주먹으로 쳤다. 지금까지 잘못 살았다면 다시 잘 살 테니 한 번만 살려달라고 했다. 나는 한빛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악을 썼다.
어디선가 읽은 글에서는 과거에 아무리 아픈 상처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삶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했다. 과거의 상처에 매달리는 것은 지금 자기 인생을 만드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과거 때문에 현재 삶을 망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어려운 과거를 딛고 일어날 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낼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가소로웠다. 아픈 상처? 이 글을 쓴 사람은 그 아픈 상처가 ‘죽음’ 아니 ‘자식의 죽음’이라도 이렇게 건방지게 말할 수 있을까? 아무런 고민도 없이 말해놓고 독자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착각하겠지 하며 분노했다. 박수도 아무 상황에나 다 적용되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살려달라고 하고 있다. 죽을 까봐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보면서 한빛을 생각했다. 한빛도 나만큼 겁이 많은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1때 학부모상담이 있어 학교에 갔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의례적이겠지만 한빛이가 학교생활을 적극적이고 열심히 잘 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한빛이가 겁이 많은 것이 의외였다고 했다. 일주일 전에 예방주사를 맞는데 한빛이 차례가 되자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간호사가 놀라 뒤로 보내 진정시킨 후 맨 나중에 맞았다고 했다. 매사 쾌활하고 학급에서 키도 가장 큰 애가 뜻밖에 겁쟁이였다며 담임선생님은 웃었다. 나는 충분히 공감했다. 내가 그러니까. 한빛도 겉으로는 센 척하고 씩씩해보여도 속은 여렸다. 내가 감추고 싶어 한 성격을 누가 아들 아니라고 할 것도 아니련만 한빛이 똑 닮은 게 속상했다.
고2때 한빛 학교를 갔다가 우연히 교실까지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다. 텅 빈 교실 한 책상 위에 모둠일기가 있었다. 얼른 펼쳐서 한빛이 쓴 일기를 찾았다. 한빛 글씨가 워낙 특이해서 쉽게 눈에 띄었다. 역시 다른 애들에 비해 글씨가 깔끔하지 않았다. 나중에 대학 논술고사에서 글씨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면 어쩌나하고 나 혼자 조마조마했던 그 글씨였다.
봄비가 오던 일요일. 운동장을 가로 질러 교실로 오면서 밟았던 흙 감촉이 평화로웠다고 썼다. 그리고 텅 빈 교실에서 혼자 공부를 하는데 들리던 빗소리가 좋았다고 했다. 한빛은 그렇게 여렸다. 나는 한빛이 너무 도시적이라 감정이 삭막할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빗소리와 흙에 대해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는 걸 보고 잘 자라고 있구나 안심했다. 먼 훗날 어른이 되어도, 행여 힘든 일이 닥쳐도 이 따듯한 정서가 한빛을 지탱해주리라는 확신까지 했었다. 나에게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그저 한빛이가 잘 자라준 것이 고마웠다. 한빛이가 다른 학생들에 비해 모둠일기를 많이 쓴 것도 기특했고 감사했다.
이상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응급실을 나오면서 나는 그 가을 이후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알았다.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세월호 예은이 아빠가 그랬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예은이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고 꿈인 것 같다고 했다. 예은이의 부재를 인정할 수 없고 아니 인정되지가 않는다고 했다. 조금 있다가 “아빠” 하고 들어설 것 같은 매일매일을 살고 계시는 예은아빠. 그래서 자신의 이름보다 예은아빠로 불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말씀하셨다.
땅에 발을 디디고 싶은데 붕 떠서 걷고 있는 것 같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숲속을 허우적대며 헤매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넘어서야 하리라. 꿈속에서는 그 짙던 안개도 동이 트자 순식간에 사라지며 새 세상을 보여주던데. 겁많고 여렸던 한빛이가 고민하고 힘들어했던 지점을 이제라도 함께 하기 위해 똑바로 버티고 서서 아침을 맞이하리라.
나는 한.빛.엄.마.니까.
- 엄마 김혜영
겁많고 여렸는데...
세월호 5주기인 지난 4월 16일. 나는 교원대에서 ‘탈북학생 이해 제고를 위한 관리자 연수’를 받고 있었다. 주제가 낯설어서인지 연수기간 내내 부담스러웠다. 특히 전날 밤 통일전담교육사 네 분의 토크쇼를 듣고는 더 그랬다. 북한에서 여교사였던 교육사들이 탈북하여 남한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들었는데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또다른 세계가 있었다. 왜 이리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가?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살게 했나 하는 생각으로 혼란스러웠고 우울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탈북문제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충격도 컸던 것 같다.
그러다 휴식시간에 무심코 스마트폰을 켰다. 세월호 관련 기사가 눈에 많이 띄었다. 아, 오늘이 4월 16일이구나. 하나를 눌렀다. 무슨 제목이었는지는 모르나 세월호에서 자식을 잃은 엄마의 인터뷰내용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대더니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옆자리 연수생이 눈치 못 채게 심호흡을 크게 했다. ‘왜 이러지? 그동안 한빛을 보내고 힘들었던 게 지금 나타나나? 아냐. 일시적일거야. 연수주제가 버거워서 그런 거야. 정신 차리자’ 하며 나를 다독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연수를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하는데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연수 마지막 날이라 곧바로 오송역으로 갔다.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 물을 몇 번씩 내리며 한참을 울었다.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질식할 것 같은 상태는 그대로였다. 기차에 올라서도 옆에 누가 앉았건 눈치 볼 것도 없이 소리 내어 울었다. 그래야 살 것 같았다. 쓰러지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기에 창피하지도 않았다.
한빛아빠와 한솔은 안산 추모제에 갔기에 내가 도착하는 시간까지 행신역에 올 수가 없었다. 불안감과 함께 점점 더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한빛한테 약속한 게 있기에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어 온 힘을 다해 정신을 붙들었다. Y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행신역까지 나와 달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나오신 선생님 차에 올라 응급실로 가달라고 하고 대성통곡을 했다. 목이 쉬고 머리가 깨지도록 울었다. 제발 가슴아 뚫려라 하며 갈비뼈가 부러지도록 주먹으로 쳤다. 지금까지 잘못 살았다면 다시 잘 살 테니 한 번만 살려달라고 했다. 나는 한빛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악을 썼다.
어디선가 읽은 글에서는 과거에 아무리 아픈 상처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삶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했다. 과거의 상처에 매달리는 것은 지금 자기 인생을 만드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과거 때문에 현재 삶을 망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어려운 과거를 딛고 일어날 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낼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가소로웠다. 아픈 상처? 이 글을 쓴 사람은 그 아픈 상처가 ‘죽음’ 아니 ‘자식의 죽음’이라도 이렇게 건방지게 말할 수 있을까? 아무런 고민도 없이 말해놓고 독자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착각하겠지 하며 분노했다. 박수도 아무 상황에나 다 적용되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살려달라고 하고 있다. 죽을 까봐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보면서 한빛을 생각했다. 한빛도 나만큼 겁이 많은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1때 학부모상담이 있어 학교에 갔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의례적이겠지만 한빛이가 학교생활을 적극적이고 열심히 잘 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한빛이가 겁이 많은 것이 의외였다고 했다. 일주일 전에 예방주사를 맞는데 한빛이 차례가 되자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간호사가 놀라 뒤로 보내 진정시킨 후 맨 나중에 맞았다고 했다. 매사 쾌활하고 학급에서 키도 가장 큰 애가 뜻밖에 겁쟁이였다며 담임선생님은 웃었다. 나는 충분히 공감했다. 내가 그러니까. 한빛도 겉으로는 센 척하고 씩씩해보여도 속은 여렸다. 내가 감추고 싶어 한 성격을 누가 아들 아니라고 할 것도 아니련만 한빛이 똑 닮은 게 속상했다.
고2때 한빛 학교를 갔다가 우연히 교실까지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다. 텅 빈 교실 한 책상 위에 모둠일기가 있었다. 얼른 펼쳐서 한빛이 쓴 일기를 찾았다. 한빛 글씨가 워낙 특이해서 쉽게 눈에 띄었다. 역시 다른 애들에 비해 글씨가 깔끔하지 않았다. 나중에 대학 논술고사에서 글씨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면 어쩌나하고 나 혼자 조마조마했던 그 글씨였다.
봄비가 오던 일요일. 운동장을 가로 질러 교실로 오면서 밟았던 흙 감촉이 평화로웠다고 썼다. 그리고 텅 빈 교실에서 혼자 공부를 하는데 들리던 빗소리가 좋았다고 했다. 한빛은 그렇게 여렸다. 나는 한빛이 너무 도시적이라 감정이 삭막할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빗소리와 흙에 대해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는 걸 보고 잘 자라고 있구나 안심했다. 먼 훗날 어른이 되어도, 행여 힘든 일이 닥쳐도 이 따듯한 정서가 한빛을 지탱해주리라는 확신까지 했었다. 나에게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그저 한빛이가 잘 자라준 것이 고마웠다. 한빛이가 다른 학생들에 비해 모둠일기를 많이 쓴 것도 기특했고 감사했다.
이상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응급실을 나오면서 나는 그 가을 이후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알았다.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세월호 예은이 아빠가 그랬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예은이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고 꿈인 것 같다고 했다. 예은이의 부재를 인정할 수 없고 아니 인정되지가 않는다고 했다. 조금 있다가 “아빠” 하고 들어설 것 같은 매일매일을 살고 계시는 예은아빠. 그래서 자신의 이름보다 예은아빠로 불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말씀하셨다.
땅에 발을 디디고 싶은데 붕 떠서 걷고 있는 것 같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숲속을 허우적대며 헤매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넘어서야 하리라. 꿈속에서는 그 짙던 안개도 동이 트자 순식간에 사라지며 새 세상을 보여주던데. 겁많고 여렸던 한빛이가 고민하고 힘들어했던 지점을 이제라도 함께 하기 위해 똑바로 버티고 서서 아침을 맞이하리라.
나는 한.빛.엄.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