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8일은 구의역 스크린도어 참사 4주기다. 안전 수칙에 따라 스크린도어 작업은 2인 1조로 진행되는 게 원칙이었지만 19세 김군은 홀로 작업하다 변을 당했다. 열악한 작업환경과 관리 소홀이 빚어낸 예견된 사고였다. 아니 산업재해였다. 컵라면과 검은 색 탄가루가 묻어 얼룩덜룩해진 수첩 등이 들어있던 김군 가방이 지금도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파 울컥울컥한다.
‘우리는 왜 날마다 명복을 비는가?’ ‘우리는 왜 넘어진 자리에서 거듭 넘어지는가’ ‘오늘도 7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란 슬픈 문장을 요즘은 너무도 쉽게 접한다. 이 단순한 한 줄 문장 아래 얼마나 많은 유가족들이 숨을 쉬고 있어도 죽어있는 삶을 살고 있을까? 동료들은 또 얼마나 희망 없는 세상에 분노하며 그래도 혹시나 하면서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버티어 내고 있을까?
김군의 죽음이 왜 구조적인 문제를 담고 있는지 나는 아들 한빛에게 처음 들었다. 뉴스에서 접했을 때 부끄럽지만 나는 매일 발생하는 사건의 하나려니 했다. 작업하다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사고려니 했다. 단지 20대 두 아들의 엄마여서 그랬을까? 김군이 청년인 게 안타까웠다. 그리고 취업이 어렵다는데 힘들게 들어간 직장에서 뜻도 못 피운 것을 안쓰러워했다.
당연히 남의 집 슬픈 얘기였다. 그런데 한빛이 김군의 죽음을 얘기하면서 ‘비정규직’과 ‘산업안전장치’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그 단어들은 신문에서 가끔 봤으나 솔직히 뭔지 몰라도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모든 일자리는 ‘직원’과 ‘알바생’으로 나누어져 있을 뿐 취업하면 직장인은 다 똑같이 대우받는 줄 알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있고 그들의 처우가 다르다는 것도 몰랐다. ‘산업안전’이란 것도 산업이란 말 자체가 얼마나 큰 말인데 안전장치는 기본으로 되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과서에서 산업에 대해 배울 때 국가, 회사처럼 큰 시설을 상상하지 않았나? 어련히 잘 할 텐데 한빛은 무슨 법제정까지 필요하다고 하니 좀 지나치다 했다.
한빛은 김군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고 엄마는 특히 교사니까 이런 것은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노동교육’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 학생들의 대부분이 모두 노동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지만 왠지 시기상조 같았고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사범대학 졸업 후 학교에서만 근무했기에 나는 회사시스템이나 사회 변화에 영향을 덜 받은 것 같다. 비정규직이란 말도 낯설고 안전의식도 그랬다. 학교 곳곳에 위험요소가 내재되어 있어도 “하지 마라” “가지 마라”란 말을 반복하거나 위험한 곳을 폐쇄시키면 됐다. 세월호 이후에나 학교안전망에 대해 피부로 느끼면서 그동안의 위험했었던 순간이 섬뜩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쩌면 그만큼 내 일이 아니라고 무관심했을지도 모른다. 김군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런 저런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점을 제시하는 한빛이 참 바른 생각을 갖고 있는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이 기특했다.
그러나 올해도 여전히 씁쓸하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전 국민 안전대책이 강조되는 상황인데도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만 마스크를 지급하고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은 외면당하는 일이 있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또 오늘도 비정규직은 기계부품처럼 일하다가 하루에 대여섯명 이상은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세상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빛이 구의역에 가서 김군을 생각하며 페붘에 썼던 글을 읽었다.(2016.5.31.) 한빛이 살아있었을 때 쓴 글이다. ‘살아있었을 때’라는 과거완료가 가슴을 친다.
일찍 퇴근했기에 시간이 생겼다. 그래서 구의역에 갔다.
막차가 올 때까지 자릴 지키려 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하고 현장을 떠났다. 슬 픔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짜증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솟구쳐 머리가 아팠기에. 역사를 빠져나왔다.
구조와 시스템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죽음이란 비참함. 생을 향한 노동이 오히려 생의 불 씨를 일찍, 아니 찰나에 꺼뜨리는 허망함. 이윤이니 효율이니 헛된 수사들은 반복적으로 실제의 일상을 쉬이 짓밟는다. 끔찍한 비극의 행렬에 비록 희망을 노래하는 이가 없을지라 도 염치와 반성은 존재할 것이란 기대도 같이 스러진다.
망하지 않아 망하지 못한 세상이다. 아니 망하지 못해 망하지 않는 세상이 맞을런가.
어느 게 정답인지 모르겠다. 둘 중 무엇이든, 답답한 동어반복으로 밖에 설명될 수 없는 현실이 다시금 한 삶을 부러뜨렸다.
얼굴조차 모르는 그이에게 오늘도 수고했다는 짧은 편지를 포스트잇에 남기고 왔다.
‘오늘’이라 쓰지 않으면 내가 무너질 것 같기에 오.늘.이라 힘주어 적었다.
읽으면서 엉엉 울었다. 내 아들 한빛은 아름다운 청년이었구나. 얼마나 고민이 많았으면 하루가 무너질 만큼 힘들었을까? 망하지 못해 망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였을 것이다. 끔찍한 죽음의 행렬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음에, 가느다란 희망이 없을지라도 최소한 염치조차도 기대할 수 없기에 한빛은 절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한빛의 마음을 물어보지 못했다. 읽으려고도 안 했다. 성실하니 잘 살아나가려니 했다.
구의역 참사를 얘기하면서 한빛은 자기 속마음을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괜한 걱정을 할까 불편했을 것이다. 나에게라도 털어놓았다면 좀 덜어지지 않았을까? 하긴 엄마는 그런 그릇도 못 되니 얘기하기가 그랬겠지. 그래도 들어줄 수는 있었는데... 이렇게 착한 한빛이니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혼자만 잘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한빛의 짐을 조금도 덜어주지도 나누지도 못했다. 마음을 포개주지도 못했고 기댈 언덕도 되어 주지 못했다. 너무나 미안해서 가슴이 아프도록 악을 쓰며 울었다.
김군과 이후 김용균 같은 안타까운 죽음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4년간 수많은 정치인이 약속하고 공약을 내세웠지만 여전히 우리 노동자들은 매일 퇴근하지 못하고 죽고 있다. ‘오늘도 7명이 퇴근하지 못했다’에 달린 댓글이 가슴을 쳤다. “우리 남편도 2년이 다 가는데 아직 퇴근을 못하고 있어요”
<참여사회>(2020년 5월호/참여연대 발행) Cover story를 얼핏 봤는데 가슴이 쿵 했다. 나에겐 어려운 ‘의료영리화’에 관한 글이었는데 한빛 글이 포개지며 딱 내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경제적 이익’이라는 단어를 가치중립적 의미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 위기 앞에서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 외면(원문: 의료의 영리화)은 더 이상 중립이 아닌 ‘악’을 의미합니다. 더 가치중립적으로 말씀드리면 모든 생명에는 가격이 없습니다.
한빛은 말하고 싶을 것이다.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주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꼭 필요하다고.
한빛아, 엄마가 대신 외칠게. (2020.5)
5월 28일은 구의역 스크린도어 참사 4주기다. 안전 수칙에 따라 스크린도어 작업은 2인 1조로 진행되는 게 원칙이었지만 19세 김군은 홀로 작업하다 변을 당했다. 열악한 작업환경과 관리 소홀이 빚어낸 예견된 사고였다. 아니 산업재해였다. 컵라면과 검은 색 탄가루가 묻어 얼룩덜룩해진 수첩 등이 들어있던 김군 가방이 지금도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파 울컥울컥한다.
‘우리는 왜 날마다 명복을 비는가?’ ‘우리는 왜 넘어진 자리에서 거듭 넘어지는가’ ‘오늘도 7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란 슬픈 문장을 요즘은 너무도 쉽게 접한다. 이 단순한 한 줄 문장 아래 얼마나 많은 유가족들이 숨을 쉬고 있어도 죽어있는 삶을 살고 있을까? 동료들은 또 얼마나 희망 없는 세상에 분노하며 그래도 혹시나 하면서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버티어 내고 있을까?
김군의 죽음이 왜 구조적인 문제를 담고 있는지 나는 아들 한빛에게 처음 들었다. 뉴스에서 접했을 때 부끄럽지만 나는 매일 발생하는 사건의 하나려니 했다. 작업하다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사고려니 했다. 단지 20대 두 아들의 엄마여서 그랬을까? 김군이 청년인 게 안타까웠다. 그리고 취업이 어렵다는데 힘들게 들어간 직장에서 뜻도 못 피운 것을 안쓰러워했다.
당연히 남의 집 슬픈 얘기였다. 그런데 한빛이 김군의 죽음을 얘기하면서 ‘비정규직’과 ‘산업안전장치’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그 단어들은 신문에서 가끔 봤으나 솔직히 뭔지 몰라도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모든 일자리는 ‘직원’과 ‘알바생’으로 나누어져 있을 뿐 취업하면 직장인은 다 똑같이 대우받는 줄 알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있고 그들의 처우가 다르다는 것도 몰랐다. ‘산업안전’이란 것도 산업이란 말 자체가 얼마나 큰 말인데 안전장치는 기본으로 되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과서에서 산업에 대해 배울 때 국가, 회사처럼 큰 시설을 상상하지 않았나? 어련히 잘 할 텐데 한빛은 무슨 법제정까지 필요하다고 하니 좀 지나치다 했다.
한빛은 김군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고 엄마는 특히 교사니까 이런 것은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노동교육’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 학생들의 대부분이 모두 노동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지만 왠지 시기상조 같았고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사범대학 졸업 후 학교에서만 근무했기에 나는 회사시스템이나 사회 변화에 영향을 덜 받은 것 같다. 비정규직이란 말도 낯설고 안전의식도 그랬다. 학교 곳곳에 위험요소가 내재되어 있어도 “하지 마라” “가지 마라”란 말을 반복하거나 위험한 곳을 폐쇄시키면 됐다. 세월호 이후에나 학교안전망에 대해 피부로 느끼면서 그동안의 위험했었던 순간이 섬뜩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쩌면 그만큼 내 일이 아니라고 무관심했을지도 모른다. 김군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런 저런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점을 제시하는 한빛이 참 바른 생각을 갖고 있는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이 기특했다.
그러나 올해도 여전히 씁쓸하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전 국민 안전대책이 강조되는 상황인데도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만 마스크를 지급하고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은 외면당하는 일이 있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또 오늘도 비정규직은 기계부품처럼 일하다가 하루에 대여섯명 이상은 일터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세상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빛이 구의역에 가서 김군을 생각하며 페붘에 썼던 글을 읽었다.(2016.5.31.) 한빛이 살아있었을 때 쓴 글이다. ‘살아있었을 때’라는 과거완료가 가슴을 친다.
일찍 퇴근했기에 시간이 생겼다. 그래서 구의역에 갔다.
막차가 올 때까지 자릴 지키려 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하고 현장을 떠났다. 슬 픔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짜증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솟구쳐 머리가 아팠기에. 역사를 빠져나왔다.
구조와 시스템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죽음이란 비참함. 생을 향한 노동이 오히려 생의 불 씨를 일찍, 아니 찰나에 꺼뜨리는 허망함. 이윤이니 효율이니 헛된 수사들은 반복적으로 실제의 일상을 쉬이 짓밟는다. 끔찍한 비극의 행렬에 비록 희망을 노래하는 이가 없을지라 도 염치와 반성은 존재할 것이란 기대도 같이 스러진다.
망하지 않아 망하지 못한 세상이다. 아니 망하지 못해 망하지 않는 세상이 맞을런가.
어느 게 정답인지 모르겠다. 둘 중 무엇이든, 답답한 동어반복으로 밖에 설명될 수 없는 현실이 다시금 한 삶을 부러뜨렸다.
얼굴조차 모르는 그이에게 오늘도 수고했다는 짧은 편지를 포스트잇에 남기고 왔다.
‘오늘’이라 쓰지 않으면 내가 무너질 것 같기에 오.늘.이라 힘주어 적었다.
읽으면서 엉엉 울었다. 내 아들 한빛은 아름다운 청년이었구나. 얼마나 고민이 많았으면 하루가 무너질 만큼 힘들었을까? 망하지 못해 망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였을 것이다. 끔찍한 죽음의 행렬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음에, 가느다란 희망이 없을지라도 최소한 염치조차도 기대할 수 없기에 한빛은 절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한빛의 마음을 물어보지 못했다. 읽으려고도 안 했다. 성실하니 잘 살아나가려니 했다.
구의역 참사를 얘기하면서 한빛은 자기 속마음을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괜한 걱정을 할까 불편했을 것이다. 나에게라도 털어놓았다면 좀 덜어지지 않았을까? 하긴 엄마는 그런 그릇도 못 되니 얘기하기가 그랬겠지. 그래도 들어줄 수는 있었는데... 이렇게 착한 한빛이니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혼자만 잘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한빛의 짐을 조금도 덜어주지도 나누지도 못했다. 마음을 포개주지도 못했고 기댈 언덕도 되어 주지 못했다. 너무나 미안해서 가슴이 아프도록 악을 쓰며 울었다.
김군과 이후 김용균 같은 안타까운 죽음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4년간 수많은 정치인이 약속하고 공약을 내세웠지만 여전히 우리 노동자들은 매일 퇴근하지 못하고 죽고 있다. ‘오늘도 7명이 퇴근하지 못했다’에 달린 댓글이 가슴을 쳤다. “우리 남편도 2년이 다 가는데 아직 퇴근을 못하고 있어요”
<참여사회>(2020년 5월호/참여연대 발행) Cover story를 얼핏 봤는데 가슴이 쿵 했다. 나에겐 어려운 ‘의료영리화’에 관한 글이었는데 한빛 글이 포개지며 딱 내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경제적 이익’이라는 단어를 가치중립적 의미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 위기 앞에서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 외면(원문: 의료의 영리화)은 더 이상 중립이 아닌 ‘악’을 의미합니다. 더 가치중립적으로 말씀드리면 모든 생명에는 가격이 없습니다.
한빛은 말하고 싶을 것이다.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주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꼭 필요하다고.
한빛아, 엄마가 대신 외칠게. (2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