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김혜영
- 처음 공식적으로 한빛관련 글을 썼다. 신비에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고 나를 돌아보고 싶어서였다.
평화는 지금, 여기에 있었습니다
김혜영(사비나)
2016년 10월. 아들 프란치스코가 내 곁을 떠난 후 나에게는 시간도 함께 멈췄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속절없이 아니 아무 감각없이, 흘러가는 세상의 시간을 죽이며 울 수 밖에 없었다. 아들한테 ‘엄마는 너를 가슴에 묻지 않고 부활시켜 함께 걸어가고 같이 살아갈거야’ 약속했지만 희망일 뿐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어느 날 문득 더 두려웠던 것은 시간만 멈춘 게 아니고 한빛에 대한 기억도 스물일곱살에 멈췄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여기’ 프란치스코를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랬었는데... ~그랬지...” 자꾸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그 해 4월에 아들은 노란 세월호 리본을 내 가방에 달아주며 “엄마, 기억하기 위한 작은 의식이여요. 기억도 의식을 갖추면 용기가 생겨요. 혼자보다는 함께 하는 공동체에서 우리는 소망을 이루기가 쉽고 연대할 때 혼자라는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거든요.”하며 불편해하지 말라고 했다. 솔직히 4월이면 미안했다. 노란 리본을 달고 싶지만 사람들이 대단히 의식있게(?) 볼까봐, 허리가 아파 전철에서도 노약자석이 비어있으면 냉큼 달려가는데 나 때문에 비도덕적이라고 통째로 욕먹을까봐 리본달기를 주저했었다. 또 광화문에 나가 힘을 보태주는 것도 아니고 그들과 한 공동체란 생각을 매일하는 것도 아닌 게 부끄러워서 리본을 슬그머니 풀어놓은 적도 있었다. 아들은 리본을 단다는 지극히 작은 의식에는 서로의 가슴속에 있는 평화의 씨앗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작은 씨앗이 큰 평화의 바람이 되어 고통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든다고 했다. 아들은 나에게 공동체의 평화를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지금 아들은 내곁에 없다.
이번 부활을 지나면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를 묵상하는데 가슴이 울컥했다. 지금까지 ‘부활’은 나에게 추상명사였고 ‘평화’ 역시 상투적인 언어였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와 함께 예수님의 ‘평화’가 가슴을 쳤다. ‘평화’는 특별한 사람만이 누리고 멀리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사비나, 안 될 것 같아. <하늘의 문>에는 본당 신자만이 들어갈 수 있대. 신부님과 협의해 본다니까 기도하며 기다려보자” 아들의 죽음앞에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간절함도 없었다. 넋이 나갔는데 무슨 기도를? 그런데 아들은 첫영성체를 받았고 복사를 섰던 신곡2동 성당 봉안당 <하늘의 문>에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아들은 내 곁에 없는데... 퇴근 후 프란치스코를 만나 위령기도를 하고 성전에서 목이 쉬도록 울고 예수님께 아들을 데려간 이유를 대라고 따졌지만 아무 답도 주시지 않았다. 아들을 잃고도 엄마인 나는 버젓이 살아있다는 것에 혐오감을 느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성당에 와서 울고 기도하고 다음 날 또 울고 기도하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성당을 나설 때 가느다란 희망을 갖고 아들한테 당당하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시간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오묘했다. 예수님이 제자에게 오셨듯이 나에게 오셔서 “평화가 사비나와 함께” 하며 부활을 깨닫게 하신 것 같다. 아들의 복사시절 얘기를 들으시고 신부님께서 선뜻 <하늘의 문>을 허락하신 것을 과연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늘의 문>이 신곡2동 성당이 나의 근무처와 10분거리라는 것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천국행 보험들듯이 주일미사만 하던 날라리 신자인 내가 평일에 성체조배를 하며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 단순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도피처였을까? 희망 없는 매일매일이 고통스럽고 눈가가 짓물려 쓰라리지만 이상하게 성당을 나설 때면 조금씩 조금씩 평화로움을 느꼈다. 예수님과 성모님만이 나를 평화롭게 해주신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꼈다. 불쑥불쑥 아들이 그립고 자주 흔들리고 힘들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손을 꼭 쥐고 있을 때 내 마음에 평화가 가득차고 위로받는 느낌을 받았다.
저 앞 제대에 복사를 서던 아들의 거룩한 기억. 아침잠이 많은 내가 가끔 아픈 척을 하면 어린 아들은 혼자 겨울 새벽미사를 갔다. 어둠속으로 뛰어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 이러고도 엄마라고 할 수 있나? 예수님 죄송해요 했던 부끄러운 기억. 서울로 이사 가던 날. 이사비용이 적금 만기액보다 적게 나와 이삿짐 차가 부릉부릉하는데 ‘잠깐만요’하고 30만원을 채워 성당으로 뛰어가 마지막 성전건립기금을 냈던 기억. 성모유치원에 보내고 싶어 토요일부터 밤새워 줄을 섰던 기억. 지금은 주교좌성당이 된 의정부2동 성당 주일학교 미사때 맨 앞줄에 앉아 두 눈을 꼬옥 감고 작은 손을 모아 기도하던 착한 아들에 대한 기억. 그래. 모두가 평화로운 기억이었다.
지금, 여기서 느껴지는 이 모든 기억들이 평화 그 자체였었다. 아들은 엄마에게 지금, 여기에서 평화를 느끼고 더 나아가 공동체의 평화를 품도록 가르쳐주었던 거다. 엄마가 잘 견디도록...
비록 아들이 떠난 후 사는 것이 아닌 견.디.어.내는 일상이지만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이 평화. 예수님이 “평화가 사비나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신비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동안 멀리서 평화를 찾았다. 예수님이 평화를 주셨지만 인정하지 않았다. 아들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힘이 빠졌다. 성당의 배려로 아들을 따듯하게 잘 보낼 수 있었던 오순절추도식과 추모미사도 평화였고 예수님 앞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 신부님께서 건네주신 신앙서적과 신부님의 기도도 평화였다. 프란치스코를 위해 150단 기도를 하셨다며 주신 신부님의 묵주도 과분한 평화였다.
지금, 여기의 평화는 더 이상 부활이 예수님한테만 해당되는 특별한 단어가 아님을 가르쳐줬다. 부활은 새로운 생명으로의 탄생이라는 것을 다시 기억하게 했다.
기억... 이제 나는 평화속에서 프란치스코를 기억해야 한다. 함께 평화롭게 걸어가고 평화롭게 같이 살아가야 한다. 고통의 삶일지라도 순간 순간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평화로웠던 지금, 여기의 평화를 붙잡아야 한다. 예수님이 나에게 준 평화를 프란치스코를 부활시켜 함께 나누기 위해 나는 할 일이 많다.
아들을 부활시켜 함께 살아가겠다고 한 약속도 지킬 자신이 생겼다. 지금, 여기의 평화를 붙잡고 있는 한 예수님은 절대 나를 놓지 않으실 것을 확신한다. 나자신에게 끝없이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면서 견.디.어.낼 수 있을 것 같다.
(2018 의정부교구 주최 제7회 삶의 향기 공모전 우수작)
- 엄마 김혜영
- 처음 공식적으로 한빛관련 글을 썼다. 신비에 감사를 표현하고 싶었고 나를 돌아보고 싶어서였다.
평화는 지금, 여기에 있었습니다
김혜영(사비나)
2016년 10월. 아들 프란치스코가 내 곁을 떠난 후 나에게는 시간도 함께 멈췄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속절없이 아니 아무 감각없이, 흘러가는 세상의 시간을 죽이며 울 수 밖에 없었다. 아들한테 ‘엄마는 너를 가슴에 묻지 않고 부활시켜 함께 걸어가고 같이 살아갈거야’ 약속했지만 희망일 뿐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어느 날 문득 더 두려웠던 것은 시간만 멈춘 게 아니고 한빛에 대한 기억도 스물일곱살에 멈췄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여기’ 프란치스코를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랬었는데... ~그랬지...” 자꾸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그 해 4월에 아들은 노란 세월호 리본을 내 가방에 달아주며 “엄마, 기억하기 위한 작은 의식이여요. 기억도 의식을 갖추면 용기가 생겨요. 혼자보다는 함께 하는 공동체에서 우리는 소망을 이루기가 쉽고 연대할 때 혼자라는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거든요.”하며 불편해하지 말라고 했다. 솔직히 4월이면 미안했다. 노란 리본을 달고 싶지만 사람들이 대단히 의식있게(?) 볼까봐, 허리가 아파 전철에서도 노약자석이 비어있으면 냉큼 달려가는데 나 때문에 비도덕적이라고 통째로 욕먹을까봐 리본달기를 주저했었다. 또 광화문에 나가 힘을 보태주는 것도 아니고 그들과 한 공동체란 생각을 매일하는 것도 아닌 게 부끄러워서 리본을 슬그머니 풀어놓은 적도 있었다. 아들은 리본을 단다는 지극히 작은 의식에는 서로의 가슴속에 있는 평화의 씨앗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작은 씨앗이 큰 평화의 바람이 되어 고통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든다고 했다. 아들은 나에게 공동체의 평화를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지금 아들은 내곁에 없다.
이번 부활을 지나면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를 묵상하는데 가슴이 울컥했다. 지금까지 ‘부활’은 나에게 추상명사였고 ‘평화’ 역시 상투적인 언어였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와 함께 예수님의 ‘평화’가 가슴을 쳤다. ‘평화’는 특별한 사람만이 누리고 멀리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사비나, 안 될 것 같아. <하늘의 문>에는 본당 신자만이 들어갈 수 있대. 신부님과 협의해 본다니까 기도하며 기다려보자” 아들의 죽음앞에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간절함도 없었다. 넋이 나갔는데 무슨 기도를? 그런데 아들은 첫영성체를 받았고 복사를 섰던 신곡2동 성당 봉안당 <하늘의 문>에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아들은 내 곁에 없는데... 퇴근 후 프란치스코를 만나 위령기도를 하고 성전에서 목이 쉬도록 울고 예수님께 아들을 데려간 이유를 대라고 따졌지만 아무 답도 주시지 않았다. 아들을 잃고도 엄마인 나는 버젓이 살아있다는 것에 혐오감을 느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성당에 와서 울고 기도하고 다음 날 또 울고 기도하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의 평화를 느꼈다. 성당을 나설 때 가느다란 희망을 갖고 아들한테 당당하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시간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오묘했다. 예수님이 제자에게 오셨듯이 나에게 오셔서 “평화가 사비나와 함께” 하며 부활을 깨닫게 하신 것 같다. 아들의 복사시절 얘기를 들으시고 신부님께서 선뜻 <하늘의 문>을 허락하신 것을 과연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늘의 문>이 신곡2동 성당이 나의 근무처와 10분거리라는 것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천국행 보험들듯이 주일미사만 하던 날라리 신자인 내가 평일에 성체조배를 하며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 단순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도피처였을까? 희망 없는 매일매일이 고통스럽고 눈가가 짓물려 쓰라리지만 이상하게 성당을 나설 때면 조금씩 조금씩 평화로움을 느꼈다. 예수님과 성모님만이 나를 평화롭게 해주신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꼈다. 불쑥불쑥 아들이 그립고 자주 흔들리고 힘들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손을 꼭 쥐고 있을 때 내 마음에 평화가 가득차고 위로받는 느낌을 받았다.
저 앞 제대에 복사를 서던 아들의 거룩한 기억. 아침잠이 많은 내가 가끔 아픈 척을 하면 어린 아들은 혼자 겨울 새벽미사를 갔다. 어둠속으로 뛰어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 이러고도 엄마라고 할 수 있나? 예수님 죄송해요 했던 부끄러운 기억. 서울로 이사 가던 날. 이사비용이 적금 만기액보다 적게 나와 이삿짐 차가 부릉부릉하는데 ‘잠깐만요’하고 30만원을 채워 성당으로 뛰어가 마지막 성전건립기금을 냈던 기억. 성모유치원에 보내고 싶어 토요일부터 밤새워 줄을 섰던 기억. 지금은 주교좌성당이 된 의정부2동 성당 주일학교 미사때 맨 앞줄에 앉아 두 눈을 꼬옥 감고 작은 손을 모아 기도하던 착한 아들에 대한 기억. 그래. 모두가 평화로운 기억이었다.
지금, 여기서 느껴지는 이 모든 기억들이 평화 그 자체였었다. 아들은 엄마에게 지금, 여기에서 평화를 느끼고 더 나아가 공동체의 평화를 품도록 가르쳐주었던 거다. 엄마가 잘 견디도록...
비록 아들이 떠난 후 사는 것이 아닌 견.디.어.내는 일상이지만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이 평화. 예수님이 “평화가 사비나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신비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동안 멀리서 평화를 찾았다. 예수님이 평화를 주셨지만 인정하지 않았다. 아들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힘이 빠졌다. 성당의 배려로 아들을 따듯하게 잘 보낼 수 있었던 오순절추도식과 추모미사도 평화였고 예수님 앞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 신부님께서 건네주신 신앙서적과 신부님의 기도도 평화였다. 프란치스코를 위해 150단 기도를 하셨다며 주신 신부님의 묵주도 과분한 평화였다.
지금, 여기의 평화는 더 이상 부활이 예수님한테만 해당되는 특별한 단어가 아님을 가르쳐줬다. 부활은 새로운 생명으로의 탄생이라는 것을 다시 기억하게 했다.
기억... 이제 나는 평화속에서 프란치스코를 기억해야 한다. 함께 평화롭게 걸어가고 평화롭게 같이 살아가야 한다. 고통의 삶일지라도 순간 순간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평화로웠던 지금, 여기의 평화를 붙잡아야 한다. 예수님이 나에게 준 평화를 프란치스코를 부활시켜 함께 나누기 위해 나는 할 일이 많다.
아들을 부활시켜 함께 살아가겠다고 한 약속도 지킬 자신이 생겼다. 지금, 여기의 평화를 붙잡고 있는 한 예수님은 절대 나를 놓지 않으실 것을 확신한다. 나자신에게 끝없이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면서 견.디.어.낼 수 있을 것 같다.
(2018 의정부교구 주최 제7회 삶의 향기 공모전 우수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