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여전히 나는 '한빛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나의 아들 한빛의 3주기를 지나며(1) - ‘영원한 숙제’이지만 ‘끝낼 수 있는 숙제’로

김혜영
2019-11-29
조회수 1481

 한빛이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3년이 되었다. 10월이 되면서 센터에서도 3주기 추모제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한빛아빠도 많이 신경 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아무 관여도 안하고 도움도 안 되지만 마음은 힘들었다. 한빛아빠의 전화통화를 엿들으며 추모제 프로그램이나 장소 섭외 등에 어려움이 있구나 짐작했지만 묻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왜 한빛 추모제를 하는 거지? 한빛이 정말 이 세상에 없나? 아, 한빛 결혼식이라면, 아니 한빛 생일이라도 깜짝 이벤트를 잘하는 내가 이렇게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10월에 들어오면서 계속 마음이 허했다. 쫒기고 있는 듯한 불안함, 그렇다고 뛰고 있지도 않는데 아무 것도 잡히지도 않고 잡을 수가 없었다. 매번 허우적대며 두 손을 뻗어보지만 헛손질하는 느낌이었다. 좀 전에 늦은 퇴근길을 걸어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가을이라 그래. 너 원래 감수성이 풍부하잖아. 붉은 낙엽들이 이렇게 길바닥에 뒹구는데 울컥하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인거야. 혜영아 넌 잘 지내고 있어. 괜찮아. 수없이 나를 토닥이며 울음을 삼켰다. 

 그래도 낙엽을 보면서 그냥 살아가는 고민만 할 수 있다면, 아니 내일 걱정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가슴이 미어졌다. 엎질러진 물은 왜 주워 담을 수 없는가? 그러게. 미리 조심했어야지. 왜 물을 엎질렀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어쩌라고. 묻고 또 물었다. 이런 마음상태를 지옥이라고 하는가? 남의 말로만 알았고 나와는 평생 상관없는 단어라고 생각했던 지옥이라는 말이 가슴 저리게 다가왔다.

 나는 한빛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결국 분명한 것은 여전히 나는 한빛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한빛 옆에 ‘죽음’이라는 단어조차도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상암동 어디선가 드라마를 기획하고 있고 어디선가 드라마를 찍고 있을 텐데 내가 ‘죽음’이란 말 함부로 썼다가 엄마 입방정 때문에 진짜로 한빛이가 하늘나라로 갈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있으면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다고 해서 한 번도 턱을 괴어 본적이 없는 나였다. 식탁을 차릴 때도 수저와 밥그릇은 왼쪽, 젓가락과 국그릇은 오른쪽에 놓았고 두 아이에게도 그렇게 놓게 했다. 맞는 말인지 아닌지 아무에게도 확인 안 했지만 제사상에 놓을 때와 반대라고 어린 시절에 들은 적이 있어서이다. 

 ‘제사=죽음’이란 등식이 어린 시절부터 박혀있었기에 지키려고 했다. 죽음이란 말이 그만큼 무섭고 두려웠었다. 한빛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많이 주의를 주었건만 커서도 번번이 반대로 식탁을 차려놓았다. 그러면 나는 그렇게 놓으면 일찍 죽는대 하며 재빨리 바꿔 놓았다. 한빛은 그걸 믿으세요? 미신이잖아요. 하며 어이없어 했고 살짝 비웃기도 했다. 그래도 난 꿋꿋했고 한빛은 마지못해 다시 바꿔놓곤 했다. 그렇게 살았는데 정말 미신이었나? 나에게는 이 집착도 아무런 부적이 되어 주지 않았다.

 지난 10월 20일. 의정부에 갔다가 전날 추모미사를 했지만 한빛이가 보고 싶어 의정부 신곡2동 성당에 또 갔다. 먼저 사무실에 들러 한빛 기일인 10월 26일에 있을 한빛을 위한 연미사(세상을 떠난 이를 위해 드리는 봉헌미사)를 신청했다. 고인의 이름난에 이한빛과 세례명 프란치스코를 정성껏 썼다. 

 그러고 한빛아빠와 나는 한빛이가 있는 <하늘의 문>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다. 그리고 차에 올랐다. 일산 초입쯤 왔을 때 우리는 한빛을 안 만나고 왔다는 사실을 동시에 알았다. 신곡2동 성당에 간 이유가, 아침부터 의정부에 간 이유가 한빛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였는데 이게 있을 수 있는 상황인가?

 급히 차를 돌려 한빛한테로 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한빛아 미안해. 엄마가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는 건지 정말 미안해. 한빛이 저녁때 집에 오는 줄 알았다. 빨리 가서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빛아빠와 나는 한빛이 우리 곁에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잊고 산다. 이러고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거기에 나를 더욱 절망케 하는 것은 여전히 이 사회가 고통스럽고 여전히 산업재해로 계속해서 죽음이 발생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방송노동환경 역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설립이후 수면위에 노출된 것만도 엄청난데 그래서 당연한데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진보와 개혁을 위해 지금의 참혹함을 감수해도 가느다란 희망조차도 붙잡을 수 없는 이 땅의 젊음도 안쓰럽다. 한빛이가 가장 경멸했고 한빛이가 죽어가며 호소했던 현실에서 과연 얼마나 나아갔나? 그리고 나는 엄마로서 무엇을 했나?

 3년동안 나는 한빛을 부활시켰다.

 지난 3년동안 나는 한빛을 부활시켜 함께 살고 있기에 잃어버린 것이 없다고 매일 나에게 각인시켰다. 그러면서 한빛이 고민하고 힘들어했던 숙제를 눈곱만치라도 해결하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나를 다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허공 속에서, 짙은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는 나를 만났다. 시도 때도 없이 슬픔과 고통이 뭉글뭉글 비집고 올라왔다.

 이제 어렴풋이 알겠다. 매일매일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 앞에서 마치 오늘 밤 ‘끝낼 수 있는 숙제’를 받은 사람처럼 안간힘을 썼다는 것을. 나는 학창시절에도 숙제는 꼭 해가는 모범생이었으니까 노력 아니 ‘노오력’하면 오늘 밤 끝낼 수 있는 숙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더구나 그 숙제가 나의 사랑하는 한빛을 위한 것인데 나의 무기인 성실성으로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속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10월이 더 힘들고 슬펐던 것 같다.

 한빛이 또 가르쳐주었구나. 미안하고 고맙다.

 비록 ‘영원한 숙제’이지만 오늘 밤이 아니라 차근차근 ‘끝낼 수 있는 숙제’로 해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끝낼 수 있는 숙제’니까 차근차근 해나가다 보면 분명 ‘끝날 수 있는 숙제’가 되지 않겠는가?

 한빛이가 말했던 ‘원래 그런 것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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