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아이들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 - 배우 허정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202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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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아이들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 -허정도>


2년 전 겨울

제가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보고 들었던 아픔들에 대한 글을 쓴 것이 재작년 1월 5일이었으니 벌써 만 2년이 되어갑니다. 처음 글을 쓴 후, 신문 기고도 하고 언론 인터뷰도 하고 시민 단체와 정부 관계자들도 만나며 개선을 위한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더디지만 현장이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며 보람도 느꼈고, 무거웠던 마음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배우로 살아온 저에겐 그 일들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언제까지 해야 할까. 어차피 내 역할은 도화선이었으니 다음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던 어느 봄날 오랜만에 작품 제안이 왔고, 그 뒤로는 조금 떨어져서 이 문제를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 해 여름과 가을

1년 만에 드라마를 찍었고, 이어서 몇 편의 독립영화와 연극에도 참여했습니다. 물고기가 다시 물을 만나 마음껏 숨 쉴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더욱 다행스러웠던 것은, 같이 하자 제안해준 분들 대부분이 저의 문제제기에 공감하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보다 나은 촬영환경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었다는 점입니다. 지킨다고 떡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어긴다고 벌을 받는 것도 아닌데,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이들이었습니다.

 

다시 겨울

뜨거웠던 농번기가 지나고 겨울이 되자 제 안에서는 서로 다른 두 목소리가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쪽에선 ‘이제 슬슬 움직여야지. 현장이 조금씩 바뀌고는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잖아’ 저를 일으켜 세우려 했고, 다른 한쪽에선 ‘법도 바뀌고 노조와 시민단체도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데 왜 굳이 너가 나서야 돼? 너도 할 만큼 했으니까 이제 그만하자’ 하며 저를 붙잡았습니다.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건 의미가 없지만 내가 튼튼해야 더 나눌 수도 있는 것인데, 얼마큼을 가지고 얼마큼을 나눌 것인지. 무엇이 지혜로운 길인지.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늘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 본업은 배우이고, 더디긴 하지만 이미 변화가 시작된 마당에,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더 목소리를 내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마무리하고 돌아서려는데 문득 제 눈에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저는 ‘아, 내가 저들을 잊고 있었다니’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우리의 아이들이었습니다.

 

여전히 방치되던 아이들

촬영장에서 가장 약하고 여린 존재는 바로 아이들, 즉 아동청소년 연기자들(배우+보조출연자)입니다. 그들은 어른보다 훨씬 얇은 신체적 정신적 보호막을 입고 있기에 더욱 촘촘하고 튼튼한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이런 아이들의 눈물을 보고도 침묵했던 것에 대한 후회와 반성, 그리고 나 또한 무지와 무심함으로 그들에게 상처 줬을지 모른다는 미안함. 그것이 제가 현장에 대한 목소리를 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부와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여러 긍정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와중에도 정작 이 문제에 관해서는 개선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온갖 잘 타는 재료들이 가득한 실내 세트장은 불이 났다 하면 대형 인명사고로 이어질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또한 구조가 워낙 복잡하여 어른들도 출구가 헷갈리는 곳이 많은데 그 어디에서도 아이들에 대한 안전교육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일부 세트장의 경우 먼지와 유해물질로 인해 건강한 어른들도 쉽게 지치고 병이 나는데, 아이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곳에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폭염과 혹한 등의 악천후 속에선 아이들과의 촬영을 제한해야 한다고 분명히 제가 처음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에 대한 조치가 전혀 없었고 결국 그 해 여름 한 아이가 더위에 쓰러져 입원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누구 하나가 죽거나 크게 다쳐야만 부랴부랴 그 아이의 이름을 딴 법을 만들 것인지. 너무나 답답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이런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 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오랜 시간 아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문제들도 있었습니다. 현장의 아이들은 배고프고 힘들고 몸이 아파도, 심지어는 폭언과 모욕적인 대우를 당하고서도 아무 말을 못합니다. 티를 냈다간 다음 기회가 없다는 것을 어른들로부터 철저히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말 잘 듣고 힘든 티 안내는 아이들 있습니다” 하며 무슨 물건 팔 듯 광고를 하던 한 에이전시 업자의 홍보문구를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 못하고 삭힌 고통이 그 순간으로 끝난다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드러내지 못한 아픔과 분노는 결국 자신을 향한 칼날이 되고, 그렇게 어린 시절 깊게 베인 상처들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쉬 아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과도한 노동시간으로 인한 건강 및 학습권 침해, 폭력적인 장면에의 노출로 인한 심리적 내상, 출연을 미끼로 한 소속사의 금품 갈취 등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동청소년의 노동시간을 제한하고 몇 가지 보호책을 언급한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이 있긴 했지만, 법 자체가 빈틈 투성이라 고쳐야 할 곳이 너무나 많았고, 무엇보다 아예 처벌 조항이 없어 어겨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으니 과연 법이라 부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이런 허술하기 짝이 없는 울타리를 마주할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바다에서, 길 위에서, 직업 실습의 현장에서, 심지어는 멀쩡한 가습기가 돌아가는 안방에서. 우리는 이미 너무나 많은 아이들을 잃었습니다. 수가 많든 적든 어른들의 무관심과 탐욕으로 인해 아이들이 희생되는 건, 그 자체로 끔찍할 뿐만 아니라 남은 우리에게도 큰 상처가 되는 일입니다. 저는 두려웠습니다. 만약 내가 발 디딘 이 현장에서 그와 같은 사고가 일어난다면, 내가 보고도 눈 감았던 것들 때문에 아이들이 죽거나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받게 된다면.. 저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기에 ‘다른 사람이 이미 나서고 있어서’ 라는 핑계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이런 두려움을 안고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래 이게 마지막이다’ 하는 마음으로.

 

그 후 1년

문은 제가 두드렸지만 그 뒤의 일은 한빛센터를 주축으로 한 여러 시민단체들이 앞장섰습니다. 아역배우 생활을 했거나 이를 지켜본 배우들의 증언을 모으고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여 문제점들을 파악했습니다. 또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해외의 성공적인 아동청소년 보호시스템에 대해서도 연구했습니다.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지금 우리의 현장에 필요한 대책들을 정리하던 중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들이 대중음악계에서 계속 들려왔습니다.

사실 저도 가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볼 때면 마음 한 편이 불편했습니다. 오직 가수 데뷔라는 꿈을 위해, 심사위원들의 무례한 말에도 그저 “감사합니다!” 90도로 인사할 수밖에 없는 저 아이들이, 과연 현장에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우받고 있을까. 방송에 나오는 게 저 정도면 도대체 현장은 어떨까. 보호는커녕 온갖 갑질을 당하고 있지는 않을까. 슬프게도 제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하루 24시간 촬영을 강요당하며 경쟁에 내몰렸고, 심지어는 그렇게 힘들게 치러낸 경쟁의 결과가 조작되었음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전직 연습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개 오디션 프로뿐만 아니라 일반 기획사 내에서도 데뷔와 관련한 돈이 오가는 등의 비리가 있었으며 소속사의 계속된 조퇴 및 자퇴 권유로 인해 대부분의 연습생들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아예 진학을 포기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말이 권유지, 소속사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연습생들에겐 강요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데뷔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그들은 실패의 상처만을 안은 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회에 내팽개쳐졌고, 이로 인해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앓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꿈꾸어왔던 데뷔에 성공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데뷔한 아이돌 가수들로부터도 참았던 목소리가 터져 나왔으니까요. 부당 계약, 수익금 갈취, 폭언, 심지어는 폭행까지.. 그곳에서 아이들은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그저 돈벌이의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아동청소년 연기자”에서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으로 그 범위를 넓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튼튼한 울타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이름은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개선 공동행동, 팝업(pop-up)”.

2018년 12월 19일이 첫 모임이었으니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난 1년간의 준비를 바탕으로, 오는 1월 14일 열리는 국회 토론회에서 첫 목소리를 내고자 합니다.

여러분, 이 움직임에 함께 해주십시오.

아래의 링크를 보시고 응원·댓글·공유 등 다양한 형태로 힘을 실어주십시오. 목표액이 달성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만 명을 목표로 시작했는데 아직 턱 없이 부족합니다.

현장의 아이들이 보다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더 이상은 상처받는 아이들을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저희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어른들에게 보다 큰 소리로 외칠 수 있게 힘을 모아주십시오.



“제가 어린 시절 외국에서 활동을 했다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아역으로 데뷔했던 후배가 외국의 아동청소년 보호시스템을 알게 된 뒤 저에게 했던 말입니다. 이 말을 하던 후배의 그 쓸쓸한 표정을 저는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에는,

대한민국의 현장에서 일하는 아이들도 꽤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더 이상 아이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글을 맺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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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홈페이지는 공익재단 공공상생연대기금과의 공동 사업으로 2019년에 제작되었습니다.